
터키 카파도키아에 있는 동굴집이 이란 북부 칸도반에도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세상 아이들의 미소를 만나다
무덥던 북부 파키스탄에서의 만남
중국의 끝에서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여정의 하이라이트는 돌아올 수 없는 사막이라는 뜻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카쉬가르라는 사막 도시에서 시작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였다. 파키스탄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가야 하는 길이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정점에 있는 쿤제랍패스는 4,700m에 이르는 옛 실크로드를 이어주던 중요한 길인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기도 하다. 카쉬가르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스페인에서 온 아저씨 네 명을 만났다. 자연스레 길동무가 되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가는데, 이때 보았던 풍경은 그 전에 보았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 하루에도 수차례 바뀌는 날씨 탓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풍경을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이 세상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던 순간들이었다.
아마도 죽음이 찾아와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은 길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달려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겠다. 거울처럼 아름다운 카라쿨 호수와 그 호수에 비치는 7,000m가 넘는 설산 무즈타그아타의 풍경 역시 예술이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경 지역인 쿤제랍패스는 ‘피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옛적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통해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던 상인들이 쿤제랍패스에서 산적들을 만나 많이 희생됐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옛 악명에 걸맞지 않게 쿤제랍패스는 무척이나 평화로운 분위기였고, 지금은 이곳을 통해 중국의 물류들이 파키스탄, 인도, 이란을 거쳐 터키까지 간다고 하니 세월의 흐름이 무상할 따름이다.

1 칼라시 밸리 붐버렛 마을에 사는 칼라시 부족. 부녀가 계곡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2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믿을 수 없는 풍경. 카라쿨 호수에 비친 무즈타그아타 산.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야. 그리고 위험한 사람들도 아니야. 그런데 왜 서방에서는 우리를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데 말이야.”
그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을 했던 듯하다.

1 나흘 만에 처음으로 눈을 마주쳐준 아이. 2 칼라시 밸리에서 만난 아이들. 사진 찍히는 게 부끄러웠는지 수도꼭지 뒤에 숨었다.
그렇게 답을 해주고 나서 그의 눈동자를 봤더니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 날 이후 절대 경험하지 않은 것,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지금껏 길을 이어왔다. 지금도 아련히 기억나는 그 무덥던 북부 파키스탄에서의 한 청년과의 만남은 내가 길을 걸어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기억하고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1 북부 파키스탄은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와 산이 만나 세상에 없는 수채화 같은 풍경을 선물해준다. 2 치트랄 가던 길에 만난 파키스탄 소녀. 몇 년이 지나도 이 사진이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진이 된 건 이때 처음으로 아이들과 눈을 마주칠 때 공명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파키스탄 길깃트에서 자전거를 한국으로 보내고 배낭여행자가 됐을 땐 카라코람 하이웨이에서 만난 소중한 벗 창수와 동생 인태가 함께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더 깊이 이해하려 노력했다. 자전거가 주는 정직함을 벗어나 좀 더 천천히 좀 더 낮게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샬라(Insh Allah), ‘신의 뜻대로’ 혹은 ‘신의 뜻이라면’이라 해석되는 무슬림들의 말이다. 아마도 나는 이 말을 들으며 파키스탄에서 지금에 이르는 길까지 오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지금껏 알아온 삶과는 확연히 다른 삶인 무슬림들의 삶과 역사, 그리고 현재 그들이 당면해 있는 보이지 않는 억압과 세상으로부터의 배척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했다. 고민 끝에 내 손에는 고장 난 디지털 카메라 한 대가 들려 있었다. 이들이 사는 현실을 세상에 알려 세상의 관심을 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내 의무이자 책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 마음먹고 사람들을 담기를 수십 일.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엔 우는 아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나 전쟁 지역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그들의 삶에 무척 가까이 다가와 있기 때문에 우는 아이들 그리고 삶의 무게에 짓 눌려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신 있게 이야기하건대 나머지 제3세계에선 그런 아이들은 찾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국제 구호단체나 NGO를 통해서 보던 아이들과 현실 사이에서는 너무나도 큰 괴리감이 있었다. 물론 동무와 싸움을 하거나 길을 가다 엎어져 우는 짧은 순간의 아이들을 사진에 담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나 역시 많은 방송 매체와 마찬가지로 아직 가보지 않은 나라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찾아 여행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우는 아이들을 위한 값싼 동정이 아닌, 웃는 아이들의 꿈을 위한, 사람들의 관심과 그 꿈을 후원할 멋진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그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칼라시 밸리 가던 길에 만난 눈빛이 신비로웠던 소녀.
칼라시 밸리에서 만난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킬 조그만 움직임이 내 안에 일어날 즈음 내 옆엔 정말 멋진 길동무들이 생겼다. 카라코람 하이웨이에서 잠깐 만났던 배낭여행자 창수와 인태가 나와 함께 중동을 반년 가까이 여행하게 된 것이다. 자전거를 한국으로 보내고 텐트며 장비 이것저것을 팔아 치운 경비로 떠나게 된 북부 파키스탄으로의 여정이었다. 벌거벗은 산, 세상 많은 산악인들이 내려오지 못한 산이 돼버린 낭가파르밧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시작으로 우리는 차를 빌려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을 만나러 북부 파키스탄 깊은 곳 칼라시 밸리로 향했다.
칼라시 밸리는 당시 빈 라덴이 숨어 있다는 첩보로 인해 우리가 그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 외인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그 후로 5년을 더 빈 라덴이 숨어 있었다 하니 얼마나 깊은 곳일까? 아주 오래전 책에서나 보던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가 그곳에 있었다. 유럽에서 출발해 파키스탄까지 그 먼 길을 달려온 알렉산더 대왕은 사람들을 그 깊은 골짜기에 남겨두고 떠났고, 그들은 그곳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의복부터 종교, 언어, 문화를 수천 년간 올곧게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무슬림도 아니었고, 자신들만의 전통을 귀하게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서 내게 알려주었다.
![[오지탐험가 김형욱의 손끝에 닿은 세상]세상의 가장자리에 천 개의 도서관을 꿈꾸다](http://img.khan.co.kr/lady/201208/20120809155441_6_oji_tra6.jpg)
[오지탐험가 김형욱의 손끝에 닿은 세상]세상의 가장자리에 천 개의 도서관을 꿈꾸다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나는 홀로 이란으로 향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서른세 시간, 선풍기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기차를 타고 퀘타에 도착해서 또다시 이란 국경인 타프탄으로 가는 밤 버스를 타고 열네 시간을 달렸다. 이란의 첫 도시에서 바로 버스를 갈아타고 테헤란까지 스물네 시간. 도착하자마자 터미널을 옮겨 열 시간을 달려 이란의 조그만 도시에 도착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미치게 달리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사흘을 꼬박 넘겨 달린 후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바로 몸살이 나버렸고 달린 그 시간만큼 숙소 침대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옛 페르시아 왕조가 살아 있는 이란에서의 또 다른 모험과 방황은 이미 그 땀으로 젖어버린 침대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김형욱은…![]() [오지탐험가 김형욱의 손끝에 닿은 세상]세상의 가장자리에 천 개의 도서관을 꿈꾸다 |
■정리 / 노정연 기자 ■글&사진 / 김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