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도 시간도 비껴간 남도의 섬 - 여수 금오도 비렁길
연일 기록적인 한파가 이어지던 1월 초, 도망치는 심정으로 남쪽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여수. 따뜻한 남해바다의 기운을 듬뿍 담은 금오도 비렁길이다.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자의 머릿속은 분주하다.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푸른 바다 위 반짝이는 초록 섬을 상상하는 일만큼 비현실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용산역을 떠난 KTX는 3시간 30분 만에 여수에 다다랐다.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 포근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영상의 날씨에 잔뜩 얼어붙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린다.
금오도 해안 기암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비렁길은 아름다운 다도해를 바라보며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트레킹 코스다. 2010년 8.5km의 1구간이 만들어진 이후 이듬해 10km의 2구간이 개설되며 총 18.5km의 코스가 완성됐다. 비경뿐 아니라 코스 중간중간 어촌의 소박한 풍경과 오래된 풍습도 접할 수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비렁’은 ‘벼랑’의 여수 사투리. 본래 주민들이 땔감 채취와 낚시를 위해 다니던 해안길이었다. 은빛 비늘 같은 매혹적인 바다, 동백이 숨어 있는 짙푸른 숲, 반짝이는 황금빛 갈대와 생생하게 와 닿는 따뜻한 햇살은 분명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었다.
아름다운 비렁길을 안은 섬, 금오도
여수에서 금오도로 들어가는 배편은 여수여객선터미널에서 금오도 함구미항으로 들어가는 것과 돌산 신기항에서 여천항으로 가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신기항에서 여천항으로 가는 배편이 시간대가 여유롭고 소요되는 시간도 짧지만, 비렁길의 출발지가 함구미항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여천항에 도착해 함구미항으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체력이 좋다면 일찍 출발해 5km 정도 걸어가는 것도 방법. 기자는 함구미항으로 바로 가는 배편을 택했다.

계절도 시간도 비껴간 남도의 섬 - 여수 금오도 비렁길

계절도 시간도 비껴간 남도의 섬 - 여수 금오도 비렁길
마을 입구에 세워진 이정표와 비렁길 안내도를 훑어보고 이내 해안절벽으로 향하는 오솔길에 들어섰다. 멀리 떠나온 섬, 도시를 벗어난 여행자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역시 소음이 사라진 적막감이다. 타닥타닥 유난히 큰 발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마을을 벗어나 항구가 내려다보인다.
금오도(金鰲島)는 금빛 자라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은 섬이다. 여수 앞바다를 수놓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섬들 중에서도 특히 때 묻지 않은 자연을 간직한 곳으로 알려졌는데 그 연유는 이렇다. 예로부터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쓰이는 황장목이 나는 곳으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민간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섬이었던 것. 덕분에 원시림이 잘 보존될 수 있었고 섬이 검게 보일 정도로 숲이 우거졌다고 해서 ‘거무섬’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임금의 관을 짤 때도 이곳의 나무를 썼다고 하니 그 명성이 높았을 만하다. 당시만큼은 아니겠지만 금오도는 여전히 사시사철 울창한 숲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한겨울에도 색을 잃지 않은 소나무와 야생화를 비롯한 갖가지 초목들이 생생한 생명의 기운을 내뿜고 있다. 울창한 숲과 밭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머리 위로 드리워진 숲이 서서히 걷히는가 싶더니 드디어 바닷가 비렁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절도 시간도 비껴간 남도의 섬 - 여수 금오도 비렁길

계절도 시간도 비껴간 남도의 섬 - 여수 금오도 비렁길
1코스의 도착점인 두포에 다다르니 정감 있는 어촌의 풍경이 펼쳐진다. 슬슬 배가 고파질 시간, 마을의 보호수가 있는 작은 민박집에 들러 문을 두드리니 귀한 손님을 맞듯 주인아주머니가 여행자를 반긴다. 찬이 없다며 차려내온 밥상이 진수성찬이다. 막 지은 쌀밥에 갓김치와 깍두기, 잡어구이, 된장국이 차려져 나왔다. 이런 꿀맛이 또 있을까 싶다. 인심 좋게 내어주신 군고구마까지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남면여객터미널에서 여수로 가는 마지막 배를 타려면 오후 4시까지는 2코스 종점인 직포마을에 도착해야 한다. 여유롭게 3시간을 예상했던 1코스의 완주 시간이 30분 초과됐다. 바다며 숲이며 정신없이 절경을 감상하느라 시간을 지체한 탓이다. 걸음을 서두르기로 하고 길을 나섰지만 1코스와는 또 다르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지나쳐 가기란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 코스는 잔잔한 옥빛 바다가 담긴 두포마을을 떠나는 것부터 시작한다. 손대면 묻어날 듯 빛깔 고운 바다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오르다 보니 연둣빛 숲길이 시야를 밝힌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은 흡사 따사로운 봄볕 같다. ‘내가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던가’ 하고 무심코 기억을 되짚었을 정도. 절벽 사이로 우뚝 솟은 촛대바위까지 산길을 오르며 한바탕 땀을 흘리고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마저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훈훈한 온기가 느껴지는 길이었다.
비렁길은 한 가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길이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찔한 절벽 앞에 서보기도 하고 초록빛이 쏟아지는 신비로운 숲을 걸을 때면 아득한 태고로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하다. 남도의 온기를 가득 담은 햇살과 향긋한 바다 내음을 떠올리며 서울로 돌아오는 길,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긴 꿈을 꾼 듯했다.

계절도 시간도 비껴간 남도의 섬 - 여수 금오도 비렁길
“섬 트레킹을 하려면 일반 트레킹보다 세심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계절과 당일 기상 조건에 따라 배 시간이 변동되는 경우가 있으니 안내된 시간표만 보지 말고 반드시 해운회사에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세요. 배 시간에 너무 촉박하게 코스를 잡으면 급한 마음에 무리하다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여유 있게 코스를 선정하고 상황에 맞게 변경, 조율해야 합니다. 섬 지역에는 버스가 하루에 몇 번 운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콜택시 번호를 미리 저장해 필요할 때 이용하세요. 섬은 날씨 변화가 심합니다. 기상 변화에 대비해 방풍의 등을 챙기고, 당일 트레킹에도 양말 등은 여분을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간식도 충분히 챙기세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안내 지도상의 숙박 시설도 미리 숙지하시기를 권합니다. 겨울에는 안내된 숙소나 식당 중 문을 닫는 곳도 있으니 미리 확인하세요. 겨울철에는 날씨가 추워 배터리가 더 빨리 소모됩니다. 여분의 휴대전화 배터리와 충전기 챙기는 것도 잊지 마세요.”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조민정 ■취재 협조 / 여수 엠블호텔(061-660-5800) ■의상 협찬 / 컬럼비아(02-540-0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