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백 일, 50개국, 1백여 개 도시…엄마와 아들의 배낭여행기
여행의 계기는 어머니의 환갑이었다. 요즘 같은 고령화 시대에 환갑이 무슨 자랑거리나 되냐고 이야기하지 마시길. 갑작스레 가장을 잃은 어머니는 눈물이 많아졌고, 어머니를 바라보는 자녀들의 마음도 어두워졌다. 어머니에게 다시 웃음을 찾아드리겠다는 목적으로 ‘환갑잔치’를 기획하던 중 “식사보단 여행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라는 누나의 농담이 운명처럼 남동생의 마음에 와 닿았다.
“TV에서 여행 프로그램이 방영되면 어머니가 ‘언젠간 갈 날이 있겠지’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것이 떠오르더라고요. 기필코 어머니와 세계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저는 막 서른이 된 3년 차 직장인이었는데요. 생각해보니 서른다섯 살에 어머니와 장기 여행을 하긴 어렵겠더라고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위기의식이 생겼습니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세계여행 제안에 어머니는 반신반의했다. 아들은 직장이 있었고, 어머니는 30년간 운영하던 가게에 매인 몸이었다. 더구나 제주도는커녕 부산 한 번 가보지 않은 주부가 세계여행이라니.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결단력 넘치는 아들이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의 가게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저는 어머니와 단둘이 마트 가는 것도 꺼리는 평범한 아들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저희 어머니는 친구같이 편한 분이세요. 학창 시절에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축제 준비 등으로 학원을 빠지고 싶을 때면 어머니에게 학원보다 축제 준비가 더 중요하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어요. 어머니는 마음이 흐르는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고요. 이런 작은 부분들이 쌓여서 어머니와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는 편안한 사이가 됐습니다. 친구 같은 어머니랑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만약에 어머니와의 여행을 떠올렸을 때 한숨부터 나왔다면 못 갔겠죠.”
확신에 찬 아들은 매일 가게로 출근해 빠듯한 일손을 도왔다. 두 달 후, 아들의 정성과 진심을 알아본 어머니는 “오케이”를 외쳤다. 승낙이 떨어지자 아들은 이전에 방문했던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을 기점으로 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루트를 짰다.
“저 혼자 다닐 때는 맥도날드에서 자도 상관없지만 제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있을 때는 상황이 다르잖아요. 여행 계획을 철저히 세웠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절 책임졌던 것처럼요.”

3백 일, 50개국, 1백여 개 도시…엄마와 아들의 배낭여행기
지난해 2월 말, 칼바람을 맞으며 모자는 인천항에 도착했다. 수십 년째 체중 40kg의 언저리에 있던 호리호리한 어머니는 10kg짜리 배낭을 메고 있었다. 효도관광이 아니고 극기 훈련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여행 고수인 원준씨는 배낭여행을 원했다. 역시, 여행의 꽃은 배낭여행이니 말이다.
“여행 초반의 목표는 항상 ‘다음날’이었습니다. 체력적으로 준비를 해서 떠난 여행이 아니라서 더욱 긴장됐죠. 다행히 체력 문제로 걱정하는 일은 없었어요. 어머니와 제 체력이 비슷하던걸요(웃음). 오히려 제가 처음 계획했던 일정보다 3개월이나 늘어났습니다. 애초에는 7개월 코스였거든요. 여행 막바지에 어머니에게 아쉽냐고 여쭤봤는데, 정말 아쉬워하시는 거예요. 세상에, 어머니의 눈빛에서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느껴졌어요. 한국에 들어가더라도 기필코 다시 나오실 거 같더라고요. 방법이 없었죠. 내친김에 북유럽과 서유럽에 다녀왔습니다. 사실 런던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어머니께서 남미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경제적, 시간적, 심적 여유가 있었다면 남미에도 갔을 겁니다(웃음).”
아들 말대로라면 어머니는 제대로 배낭여행을 즐긴 셈이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알고 여행도 해본 사람이 즐기는 법이라지 않나. 아들이 그리 말할지라도 육십 평생 처음으로 해외에 나간 어머니가 첫날부터 베테랑 여행객이 될 수는 없었을 터다. 어머니가 말을 거든다.
“처음 중국 칭타오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기온이 영하 15~20℃ 사이였어요. 생애 처음으로 맞는 칼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죠. 아들이 사라졌을 때는 또 어떻고요. 아들이 인터넷으로 검색했던 숙소가 폐업을 했더라고요. 아들은 빨리 오겠다며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골목으로 사라졌습니다. 혼자 남겨진 시간은 고작 10분이었지만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했어요.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3백 일, 50개국, 1백여 개 도시…엄마와 아들의 배낭여행기
“여행을 시작하면서 아들이 노트와 카메라를 쥐어줬어요. 직접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하라는 의미였겠죠. 매일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면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오늘 내가 보고 느낀 것, 주변 사람과 나의 관계 등에 대해서 말이에요. 누구의 엄마가 아닌 한동익이라는 사람이 된 거죠. 그래서 외국인을 만날 때마다 말했습니다. ‘콜 미 동익(동익이라 불러줘)’이라고요(웃음).”
30년 차이, 성격은 정반대지만 핏줄은 진하다
모자간의 여행,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체력과 가치관이 비슷한 절친한 친구끼리도 긴 여행으로 우정에 금이 가곤 한다. 30년 차이가 나는 어머니와 아들이라면 어떻겠는가. 더구나 모자의 성격은 정반대다. 어머니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아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허허 웃어넘기는 편이다. 아들은 좀 더 명확하다. 어머니가 어떤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지, 어떤 풍경을 보고 싶어 하는지 확실한 반응이 나올 때까지 물어보는 편이다. 여행 1백 일이 되던 날, 두 사람은 한판 붙었다. 아들도 어머니도 짜증이 폭발했다.

3백 일, 50개국, 1백여 개 도시…엄마와 아들의 배낭여행기
문제는 일정이 아니라 컨셉트였다. 에너지 넘치는 20대도 포기할 정도로 힘든 것이 배낭여행이다. 넉넉하지 않은 자금으로 숙박과 교통비, 식사까지 모두 해결해야 하니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지치는 게 당연하다. 각오는 하고 왔지만 1백 일 동안 계속된 가난한 행군에 어머니는 서서히 지쳐갔다. 아들은 은행 수수료를 아껴보겠다며 30분간 현금인출기를 찾아다녔고, 바가지를 쓰지 않겠다면서 택시 운전사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택시를 세 대째 그냥 보낸 상황이었다.
“길잡이 하는 아들도 힘들겠지만 그때는 왠지 아들이 저를 배려하지 않는 거 같았어요. 몇 천원 아끼는 것보다 빨리 숙소를 구해 1시간이라도 더 쉬는 게 효과적인데 말이죠. 괜한 고집을 피우는 거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결국 조용하던 어머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원준씨도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새벽 1시에 숙소 문을 두드리고, 어머니 입맛에 맞는 커피를 찾아 헤매고,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느라 고생했던 기억 말이다. 위기에 처한 모자는 휴식기를 갖기로 합의했다. 5일간 서로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저는 나 홀로 여행객이 된 기념으로 동네 꼬마들과 놀거나 PC방에 갔어요. 어머니는 숙소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그간 찍은 사진도 보고 앞으로 방문할 나라에 대한 정보도 찾으시더라고요. 1백 일 동안 여행하느라 망가진 머리 손질을 위해 미용실도 들렀고요. 8천원으로 한국형 아줌마 파마를 다시 완성하셨더라고요(웃음).”

3백 일, 50개국, 1백여 개 도시…엄마와 아들의 배낭여행기
“서로 챙기는 게 중요해요. 많은 사람들이 제가 일방적으로 어머니를 챙겼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다릅니다. 제가 총감독과 머슴 역할을 맡은 건 맞지만 어머니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제가 덜렁대는 편이라 짐을 싸고, 숙박비를 챙기고, 버스를 예약하는 걸 자주 잊어버렸거든요.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꼼꼼하게 챙겨주셨어요. ‘아들, 숙박비 안 냈어’ 혹은 ‘오늘 다음 도시로 가는 버스 예약하는 날이야’ 이렇게요.”
아들이 모르는 어머니에 대해서
여행을 하며 두 사람은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음식을 먹었고, 같은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그만큼 함께 나눌 수 있는 추억들도 커져만 갔다. 그중 모자가 좋아했던 여행지는 터키다.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았어요. 볼거리가 넘쳐났죠. 버섯같이 생긴 돌이 솟아 있는 카파도키아도 굉장히 인상적이었고요. 사람들도 친절했습니다. 가장 기억이 좋지 않았던 여행지는 라오스예요. 아들이 몇 년 전에는 굉장히 친절하고 사람 냄새 나는 여행지라고 말했는데 제가 본 라오스는 전혀 아니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사기를 치려고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조금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아들 역시 카파도키아를 잊을 수 없다. 하나하나의 풍경을 마음과 카메라에 담아왔기에 요즘도 가족이 모이면 여행 사진을 자주 본다고. 함께 공유할 추억이 풍성해졌다는 것 이외에 또 하나의 수확이 있다. 아들은 그동안 몰랐던 어머니에 대해서 알게 됐다. 여행지에서 어머니의 수많은 추억을 들으며 어머니의 삶에 대해 다시금 보고 느끼고 이해하게 됐다.
“아무래도 시장만큼 현지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저도 그렇지만 어머니도 시장에 다니는 걸 즐기셨어요. 특히 중국과 동남아시아 전통 시장을 굉장히 좋아하셨어요. 우리나라 옛 모습과 무척 비슷해서 더 정이 간다고 하시더라고요. 시장을 돌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셔벗을 보시고는 어머니가 어렸을 때 할머니와 셔벗을 팔러 다니셨던 얘기를 들려주셨고, 신혼여행 온 부부를 발견하셨을 때는 당신의 신혼여행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어머니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몰랐던 부분이 많더라고요. 지금의 어머니뿐 아니라 과거의 어머니와도 친해진 기분이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일상
지난해 12월, 어머니와 아들은 3백 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 땅을 밟았다. 여행 전에 영화 관련 일을 했던 아들은 사진 찍기와 여행이라는 취미를 살려 국내의 숨겨진 여행지와 문화재 관련 정보를 기록하는 일을 하고 있다. 30년간 운영했던 가게를 정리한 어머니는 새로운 취미에 푹 빠져 있다. 아들이 어머니의 새로운 인생을 전한다.
“예전에는 살고 있는 지역을 벗어나지 않으셨는데 요즘은 친구분들과 국내 여행을 다니세요. 확실히 자신감이 붙으셨어요. 가끔은 외국인들도 만나고요. 유럽여행을 할 때는 유럽인들이 무료로 재워주는 숙소 프로그램을 이용했거든요. 그때 어머니와 저를 재워준 유럽인들 중에 한국으로 여행을 온 친구들이 있어요. 그 친구들에게 어머니는 숙박은 물론 한식으로 화려한 밥상을 단박에 차려냅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한국에서도 외국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접하고,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리고 있죠. 어머니는 ‘여행은 끝났지만 여행은 계속된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20년 전, 어머니는 아들을 미국으로 보냈다. 아는 사람이 한 달간 미국에 간다기에 무작정 함께 비행기를 태운 것이다. 그것이 아들의 첫 여행 경험이다. 이번에는 아들 차례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새로운 세상을 선물했다. 그리고 모자에겐 평생 수다를 떨 수 있는 추억 한 조각이 아닌, 한 보따리가 생겼다.

3백 일, 50개국, 1백여 개 도시…엄마와 아들의 배낭여행기
1 여행은 ‘밥심’이다 고령자는 시장기를 느끼면 컨디션이 급속도로 떨어질 수 있다. 부모님이 시장기를 느끼면 숙소가 바로 앞에 있더라도 일정을 멈추고 음식을 공수해야 한다. 괜찮은 식당을 찾지 못할 때는 작은 가게에서 요기라도 하자.
2 서로 의지하되 각자의 책임을 다한다 각자 짐은 스스로 해결한다. 한 명이라도 지치면 배낭여행 자체가 망가진다. 배려도 좋지만 각자 자립심을 길러야 한다.
3 서로에게 솔직해지기 체력이든 환경이든 벅찬 부분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최대한 빨리 털어놔야 한다. 참다가 나중에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 또 컨디션 조절을 잘못하면 현지에서 병원 신세를 질 수 있다.
4 현지 언어 배우기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적어도 현지어 3가지는 배워야 한다. 같은 뜻이지만 한국에 온 외국인이 ‘헬로우’라고 영어로 말할 때와 ‘안녕하세요’라고 한국어로 인사할 때 우리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간단한 인사말로도 현지인의 마음을 열 수 있다.
한동익·태원준 모자의 아시아 여행 일지
중국 인천에서 페리를 이용해 중국 산둥성의 항구도시 칭타오에 도착했다. 2월 말 대륙의 추위를 느끼면서 기차역에서 동태가 될 뻔한 파란만장한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에서 어머니는 한국의 평범한 아줌마에서 여행을 대차게 즐기는 완숙하고 유쾌한 여인으로 변신했다. 공원에서 아침 체조를 하고 있는 중국인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체조를 하고, 호텔에서 열린 만두 빚기 게임에서 챔피언십을 거머쥐어 시원한 맥주 한 병을 아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태국 태국에서 어버이날을 맞았다. 깜짝 파티로 원준씨의 누나가 태국까지 날아왔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어머니는 환호했고, 가족은 꿈에도 잊지 못할 어버이날을 맞았다. 모자 여행에서 잠깐이나마 가족 여행으로 탈바꿈했던 태국은 아직도 어머니에게 ‘어메이징한’ 여행지로 남아 있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 모자는 오로지 육로와 뱃길을 이용해 동남아시아 말레이 대륙의 최남단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은퇴한 지 한 달 만에 여행을 떠난 예순의 어머니가 말이다. 매년 개최되는 싱가포르 예술축제에서 만난 댄서에게 어머니는 한껏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한국에서 배낭여행을 왔다. 지금 내 인생이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 당신이 있어서 더 멋진 것 같다”라고 아들을 통해서 어머니의 소감을 전달받은 댄서는 격렬한 춤사위로 보답했고, 자진해서 어머니에게 ‘인증샷’을 요청했다. 그날, 어머니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능할 거라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뤄지고 있다. 언제 품어봤는지도 모를 열정이 자꾸만 샘솟는다.’
이집트~이스라엘~요르단 중동을 또 하나의 대륙이라고 알고 있었던 어머니. 그녀에게 히잡을 쓴 여인들은 신화 속 인물 같았다. 문제는 공항 밖에서는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중동에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지도를 내밀었고, 어머니는 사막을 지목했다. 결국, 어머니는 사막에 도착했고, 오아시스에 발을 담갔으며, 사막의 석양을 목도했다. 태양이 사라지고 반대편에서 초승달이 떠오르는 모습 역시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어머니는 사막에서 가져온 모래를 아직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기획 / 장회정 기자 ■글 / 박은혜(프리랜서) ■사진 제공 / 북로그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