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가시리 마을 쫄븐갑마장길을 걷다

행복 걷기

제주 가시리 마을 쫄븐갑마장길을 걷다

지금으로부터 약 1백20만 년 전. 불덩이를 품은 채 쉼 없이 꿈틀거리며 기어이 솟아오른 백록담의 용암이 바다로 향하다 그대로 주저앉아 드넓은 평탄면을 만들었다. 제주도 한라산 동남쪽 능선 자락의 가시리마을. 병풍처럼 둘러싼 13개의 오름과 바람에 흐드러진 억새, 한가로이 뛰노는 마소들을 보고 있노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목장 길 따라 밤길 걸으며 고운 임 함께 집에 오는데….’

[행복 걷기]제주 가시리 마을 쫄븐갑마장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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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가시천
시간을 더한다는 고운 이름만큼이나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곳,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한라산 고산지대와 해안지대를 잇는 이곳에는 과거 말테우리(말떼를 돌보는 목동)들이 말을 키워 임금에게 진상하던 갑마장이 있었다. 이 말들이 다니던 길이 바로 갑마장길이다.

지난해 봄, 가시리는 마을회관에서 시작해 설오름, 따라비오름, 잦성, 큰사슴이오름, 행기머체, 조랑말 체험공원 등 총 20km 구간 8개의 오름을 지나는 ‘갑마장길’과 그 절반의 구간인 ‘쫄븐갑마장길’의 문을 열었다. ‘쫄븐’은 ‘짧은’의 제주도 방언이다. 기자가 걸어간 곳은 후자. 국토해양부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하나인 녹산로의 끄트머리, 행기머체(지하 용암 덩어리가 지상으로 솟으며 형성된 돌무더기)가 시선을 사로잡는 조랑말 체험공원이 쫄븐갑마장길의 입구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가시천을 지나 따라비오름으로 향하는 길인 오른쪽 방향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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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특유의 현무암질 용암류가 겹겹이 쌓인 대부분의 하천이 그렇듯 가시천 역시 평상시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다. 다만 바싹 말라 있지는 않고 군데군데 물이 고여 습지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가시천 주변의 숲은 이리 휘고 저리 굽은 나무들이 이끼가 잔뜩 낀 바위들, 키 작은 야생화들과 어우러져 있다. 풀을 뜯다 목이 마른 말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땅의 할아버지, 따라비오름
빽빽한 숲길을 지나다 보면 갑자기 눈앞이 훤해진다. 이는 곧 따라비오름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정상부까지 이어진 목재 계단을 절반쯤 올랐을까. 숨이 차오른다. 잠시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봤다. 크고 작은 오름들과 넓은 평원,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발 90~570m 사이에 고르게 펼쳐진 가시리마을의 화산평탄면이 답답한 마음의 체증을 시원하게 씻어낸다.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흐릿하게나마 한라산이 보인다.

정상에 올라 오름 전체를 뒤덮은 억새와 마주했다. 가득 찬 억새 물결이 살랑거린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진다. 형형색색의 등산복 차림으로 뒤따른 이들의 모습 또한 한 폭의 그림이다. 고요함을 깨는 건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와 풍력발전기 소리뿐이다. 왜 모두가 입을 모아 따라비오름에서 보는 경치를 칭찬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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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둘러보니 따라비오름은 여타의 오름들과 조금 다른 형상이다. 원형으로 된 큰 분화구가 마치 새끼를 품고 있듯 작은 분화구 3개를 안고 있다. 이 3개의 분화구가 부드럽고 아기자기한 능선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따라비오름의 최고점은 정상부에서 왼쪽으로 250m 정도 더 가야 한다. 주위 풍경을 둘러본 뒤 정상의 남쪽, 서쪽, 북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걸어본다. 초보자들도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바닥에는 섬유질 그물망이 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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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다니다 보면 돌로 쌓은 탑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액을 막기 위해 마을의 경계나 땅의 기운이 허한 곳에 주로 세워진 거욱대로 제주도 사람들은 탑을 쌓아 올리 때 그 속에 밥주걱이나 솥을 묻고 그 위에 돌을 사람의 키 보다 높게 쌓아야 제기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밥주걱은 솥의 밥을 긁어 담듯이 외부의 재물을 안으로 담아 들이라는 뜻이고, 솥은 뜨거운 불에도 끄덕없이 이겨내듯 마을의 재난을 막아달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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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만리의 맏형, 잣성길
따라비오름에서 하산한 뒤 서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큰사슴오름이 보인다. 여기부터가 제주도 내에서 가장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잣성길이다. ‘잣’은 제주어로 ‘널따랗게 돌들로 쌓아 올린 기다란 담’이란 뜻이다. 목장과 목장의 경계를 구분 짓고, 말들을 가둬두기 위해 세웠다.

사철 내내 푸른 삼나무 군락과 나란히 서 있는 잣성길은 굳이 갑마장 기행이 아니더라도 30~40분간 산책할 수 있도록 조성해놓았다. 도보로 우회할 경우 2km, 직선거리로 1.3km 정도며 가시리에서 매년 4월 유채꽃 축제를 할 때 트레킹 코스로 활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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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제주 땅을 내려다보면 집과 집, 마을과 마을 사이를 빗겨가며 대평원으로 용솟음쳐 올라붙은 검은 띠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검은빛 현무암이 만들어낸 돌담의 행렬을 ‘혹룡만리’라고 한다. 조선 세종 때부터 무려 4백 년간 쌓아온 총 31.4km의 잣성은 흑룡만리의 맏형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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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슴이오름·작은사슴이오름
잣성길을 따라 곧장 가면 큰사슴이오름 동남쪽에 진입하게 된다. 큰사슴이오름이 목적지라면 이곳부터 산의 정상부를 향해 걸으면 된다. 큰사슴이오름의 매력은 화산평탄면의 원지형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 가시리에 왜 목축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알 수 있다. 정상 오른쪽으로는 조선 최대의 산마장이었던 녹산장을, 왼쪽으로는 최고 품질의 말을 길러내 조정에 진상했던 갑마장을 조망할 수 있다. 갑마장이 있던 자리는 현재 가시리마을의 공동 목장이 됐다.

바로 옆 작은사슴이오름은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다. ‘작은’이라는 수사가 어울리지 않게 2개의 불구멍을 갖고 있는 쌍둥이 화산체다. 큰사슴이오름과의 샛길에 있는 중잣성길도 산행에 이어 걸어볼 만하다. 큰사슴이오름은 바로 옆 작은사슴이오름과 함께 모양새가 사슴을 닮았다 하여 이름이 붙었다. 실제로 예전에는 사슴이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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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예술가 지원센터의 예술인 초록누룽지 작가와 함께 따라비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경치를 주제로 오감을 활용해 와인 잔에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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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A] 쫄븐갑마장길 코스
(길이 10km, 소요 시간 3시간)
행기머체→조랑말 체험공원→가시천→따라비오름→잣성→국궁장→큰사슴이오름→ 유채꽃 플라자→꽃머체→행기머체

[코스 B] 갑마장길 코스
(길이 20.2km, 소요 시간 7시간)
방문자 센터→가시사거리→설오름→하잣성길→따라비오름→중잣성길→큰사슴이오름→유채꽃 플라자→꽃머체→행기머체→안좌동→가시사거리→방문자 센터

갑마장길 구석구석 가볼 만한 곳
조랑말 박물관 말과 관련된 유물 및 문화 예술 작품 1백여 점이 전시돼 있다. 특히 3층의 옥상정원에서는 360도 파노라마 뷰로 아름다운 가시리마을을 감상할 수 있으니 반드시 들를 것. 박물관 옆 따라비 승마장에서 말을 타고 탁 트인 초원을 달려보는 것도 좋은 체험이 될 것이다.

가시리 창작지원센터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레지던시 공간이다. 2010년 8월 개관했으며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인들이 모여 개인별 혹은 협업 작업을 통해 작품을 만들고 있다. 또 문화생활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한다.

■글&사진 / 김지윤 기자 ■취재 협조 / 가시리 유채꽃 마을 만들기 사업추진위원회(www.jejugasiri.net), 이어도나사(www.ieodotour.com), 조랑말 체험공원(064-787-0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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