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곳으로 이끈 여인
소담스러운 고택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기다란 줄에 나란히 걸려 있는 가자미들의 행렬이다. 볕 좋은 마당에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선선히 마르고 있는 것들을 보니 배 속에서 알아차리고 ‘꼬르르’ 신호를 보낸다. 이곳은 전통의 고장, 안동에 위치한 경당고택이다. 더욱 장장한 가문이나 멋들어진 고택도 많은 곳이지만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한국 고유의 전통 음식을 다룬 최초의 한글 요리서 「음식디미방」을 기록한 여인, 안동 장씨 정부인의 친정이 바로 여기, 경당고택이기 때문이다.
“장씨 부인인 할머니는 장흥효 선생의 외동딸이었어요. 귀한 자식이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학문을 가르치지 않았죠. 그럼에도 할머니는 서당을 드나들며 귀동냥으로 학문을 익혔다고 해요. 머리가 워낙 총명해서 학동들이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을 지나가면서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한문 실력도 뛰어나 12수의 한시(漢詩)를 남겨 서예가로서도 큰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조리서만큼은 당시 양반들에게는 ‘언문’이라 천대받던 한글을 고집했다. ‘내 나라 재료로 만든 음식이니 반드시 우리말로 써야 한다’라는 그녀의 확고한 의지에서였다. 「음식디미방」의 원본은 현재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지금까지 유실되지 않고 이어 내려온 이유도 그녀가 기록의 소중함을 일찌감치 예견했기 때문이다.
“「음식디미방」은 65세에 시작해 5년간 쓰신 거예요. 책갈피에 쓴 내용을 보면 ‘눈이 어두워 어렵게 쓰고 있으니 필요한 딸자식은 손수 베껴 가거라. 그리고 책은 후손에게 보관되도록 하라’라고 적어놓으셨죠. 가져가지 못하도록 단서를 달아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원본이 잘 보전돼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이제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밝혀볼까 한다. 조선 시대 부녀자는 이름조차 갖지 못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종가를 지키는 명예로운 종부일지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저 김씨 부인, 이씨 부인이었다. 그녀는 생애 대부분을 장씨 부인으로만 불리며 살다가 「음식디미방」이 재평가되면서 위패를 통해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계수나무 계’, ‘향기 향’자를 쓰는 장계향이었다. ‘기록은 곧 역사’라는 선구안을 가졌던 여인은 그 스스로 이름을 구해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것이다.
두 집안을 일으키다
그녀는 스무 살에 만석꾼이라 불릴 정도로 부호였던 재령 이씨 종가에 출가했다. 남편은 이시명이라는, 아버지의 제자였다. 그러나 자식을 두고 먼저 떠난 정실의 뒤를 잇는 후실 자리였다.
“무남독녀를 말 그대로 재취 자리로 출가시킨 거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경당 선조께서 이시명이라는 제자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출가시켰겠는가를 방증하는 것이죠.”
남편과는 여덟 살 차이, 게다가 후실로 들어간 자리였으니 새색시로서는 만만찮은 환경이었다. 우선 전부인의 소생인 여섯 살배기 아이를 키워야 했다.
그녀는 전부인과 자신의 소생 7남 3녀를 모두 번듯하게 키웠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둘째 휘일, 셋째 현일, 넷째 승일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친정에서는 외동딸이자 장녀로서, 이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자리였다.
“경당 선조께서 환갑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해요. 홀로 남은 아버지를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시아버지와 남편의 허락하에 2년 정도 친정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때 할머니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아버지를 본인 손으로 새장가 들도록 했죠.”
장계향은 무엇이든 가슴에 품었다. 도량이 크고 넓어 속세의 작은 감정에는 구애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앞에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담아냈고 치열하게 살아낸 여인인 것이다.
“할머니는 새어머니를 모셔놓고 비로소 시댁으로 되돌아가셨죠. 그 후로 10년이 지난 뒤 아버지 경당이 돌아가시게 됩니다. 새어머니와 어린 동생들만이 덩그러니 남아 살길이 없어진 거죠. 할머니는 시댁에 양해를 구하고 친정 식구를 데려와 함께 사셨어요.”
시집 근처에서 친정 동생들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혼사까지 주선했다. 그녀의 보살핌은 큰동생이 장가를 가 사당을 모실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됐다. 이는 무남독녀로 끝날 뻔한 안동 장씨 종가의 대가 이어지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장계향, 한 여인의 위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사람들을 거두고 보듬어 결국 시댁과 친정 두 가정을 일으켜 세웠다. 고택을 지키고 있는 후손 역시 사람을 위하고 베푸는 가풍을 늘 가슴에 새겨 간직하려 한다. 대문을 열어놓고 오는 발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낯선 이일지라도 이곳을 구경하러 온 사람에게 선뜻 고춧가루로 곱게 색을 낸 안동식혜를 건네주고 또 서슴없이 오래된 탱자나무에서 탐스러운 열매를 따 손에 들려준다.
“고택을 지키고 이어나가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죠. 구석구석 사람의 손이 가야 살아나거든요. 뒤뜰만 해도 잔디, 돌, 나무 모두 직접 키웠어요. 제초제도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관리합니다. 그저 구경 온 사람들이 잠시나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껴요.”
종손 장성진씨에게 잡초를 뽑는 시간은 잠시 세상 시름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때다. 「몰입의 즐거움」이란 책을 읽어보았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몰입하는 순간에 삶은 변화한다’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진리는 우리 삶 곳곳에 있고 세월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장성진씨는 1995년에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항암 치료로 인한 극심한 고통으로 생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주변 친인척들의 끊임없는 격려 그리고 부인 권순씨의 정성 어린 수발로 그는 건강을 되찾기 시작했다.
“조상님이 도우신 건지 완치 판정을 받았어요. 병원에서는 ‘암으로 돌아가실 일은 없다’라는 말을 들었죠. 그 와중에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젠 제가 업어줘야지요.”
그의 기운을 북돋아준 음식 중 하나가 팥잎국이다. 다른 집에서는 먹지 않는 종가만의 음식이다. 말린 팥잎을 삶아 콩가루를 묻힌 뒤 멸치 국물에 넣어 끓인다. 깔깔하게 씹히는 팥잎의 질감이 독특하고 팥 맛이 혀끝에서 감도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담백한 국이다.
“남편이 좋아해서 자주 해주었지요. 지금도 자주 해 먹어요. 팥잎도 끓여 먹고 상추 잎, 국화 잎도 국으로 끓여 먹으면 향기도 좋고 맛도 좋아요.”
“저희도 종가라 시집가서 일하는 건 겁이 나지 않았어요. 남편과 혼사가 오갈 때 ‘밥을 해야 한다. 괜찮니?’라고 물으셔서 ‘할 수 있다’라고 했더니 결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말은 ‘집안에 시어머니인 안주인이 없으니 네가 다 맡아서 해야 한다’라는 뜻이었어요.”
변변히 가르쳐주는 사람 없이 낯선 살림살이로 어른들을 모셔야 했다. 같은 안동이라지만 북부와 남부의 음식 문화가 미묘하게 달라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중부의 손끝에서 「음식디미방」 속 살아 있는 레시피, 경당고택의 전통 상차림이 뚝딱 차려졌다. 종손의 건강을 되찾아준 팥잎국, 안동 제사에 꼭 올라간다는 상어고기와 상어껍질편육, 안동식 장조림, 가자미조림, 간고등어까지….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북어채를 손으로 일일이 비벼 만든 북어보푸라기와 바늘귀에도 들어갈 것같이 얇은 우엉채다. 종부의 노고가 떠올라 입에 넣기 송구할 정도다. 배를 채우기보다 ‘맛을 보고 있다’라는 느낌으로 반찬 하나하나 꼭꼭 씹으며 식사를 했다. 이 너른 고택에서 외동딸로 자라며 받은 사랑을 그대로 남에게 베푼 여인, 장계향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기획 / 이유진 기자 ■사진 / 안진형(프리랜서) ■촬영 협조 / 경당고택(054-852-2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