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의 여행기 속에서 콩콩이는 부쩍 자랐다. 네 살배기의 말대답에 순간 발끈했던 엄마의 모서리 같은 마음이 눈 녹듯 풀어진 것도 여행 중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 뼘은 더 자란 콩콩이만큼이나 넉넉해진 마음 바구니를 가진 엄마의 ‘여행기 공개’는 이달로 끝을 맺지만 이들 모녀의 여행은 앞으로도 죽 이어질 것이다.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http://img.khan.co.kr/lady/201412/20141204152239_1_kongkong1.jpg)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
엄마와 함께 달리기도 열심히 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호새와 달리 콩콩이는 하고 싶은 것이 해야 하는 것보다 조금 앞서야 하는 아이. 콩콩이는 하우스텐보스 역에서 운동화 끈을 새로 묶고 싶어 했다. 그것도 시간 많아 빙글빙글 놀 때는 내내 아무렇지 않다가 플랫폼에 사람이 사라지고 차장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 시간에 하필 운동화 끈을 묶겠다고 했다. 한쪽은 풀어져 있었고 다른 한쪽은 말짱했다. 트렁크만 없었다면 번쩍 아이를 안아 기차에 오른 뒤 하겠지만 나는 손이 두 개였다. 한쪽만 급하게 묶어주고는 어서 오라며 아이 팔을 끌어당겼다. 계속 징징거리며 한쪽도 풀어질 수 있으니 다시 묶겠다며 주저앉으려고 했다. 플랫폼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주는 그 압박감을 아이는 알 수 없겠지만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엄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빨리 와. 오라고. 기차가 떠나잖아. 엄마가 올라가서 해준다고 얘기했잖아. 얼른!” 여기서 나의 딸 콩콩이가 43개월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엄마에게 감정적 행동을 개시했다. “가고 있잖아! 엄마.” 돌이켜보면 별말 아니었는데도 정말 큰 충격에 깜짝 놀랐다. 더 많이 화가 났고, 보다 더 많이 화를 낼 수 있었다. 굳은 얼굴로 아이 손을 쥔 내 손에 악력을 더하며 기차에 올랐다.
레이저가 나갈 듯한 눈빛으로 아이를 대해야 할지, 아니면 화해의 수순을 밟아야 할지 다음 행동을 정할 수가 없었다. 놀랐고 화가 나서 펄펄 뛰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한동안 아이의 눈빛과 그 말투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가 내 말에 지금 반항을 했다. 아이가 나를 안 무서워했다. 아이가 장난이 아닌 진짜 말대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만 4세도 안 된 꼬마가. 차창 밖으로 평화로운 풍광이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동짓날 팥죽 같았다. 하지만 온화한 얼굴로 웃고 있는 호새 엄마와 더 편안한 얼굴로 콩콩이 좌석을 탁탁 치며 앉으라고 하는 호새가 거기 있었다. 여행할 때 동행이 있어 좋은 점 중 하나가 여기서 나타났다. 호새 엄마에게 푸념하듯 그러나 놀라서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설명했더니, 사람 좋은 그녀는 호새의 비슷한 얘기-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 같지 않은-로 나를 위로했다. 자기도 너무 화가 나서 침대에 엎어져 꽥 소리를 지른 적도 많다고. 여기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는 ‘엄마가 돼가지고 이렇게 감정적이어서 어쩌지?’ 하며 먼데 산을 바라보는 것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 중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http://img.khan.co.kr/lady/201412/20141204152239_2_kongkong2.jpg)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
우미타마고에서 만난 세상
미키마우스의 귀 모양 머리 받침대가 있는 소닉을 타고, 나는 아이들이 좋아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호새도 콩콩이도 미키마우스를 좋아하는 아이들임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치, 하고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은 옅은 잠을 부르더니 엄마들이 자랑하고 싶었던 기차 안은 보지도 않고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호새 엄마와 나는 이동식 매점의 목소리 예쁜 판매원 언니에게 도시락과 우롱차 등을 사서 말끔하게 싹 비우고 2부 여행 준비를 마쳤다. 내 다리를 베고 통통한 자기 다리를 팔걸이에 올려놓은 채 쌕쌕거리며 자고 있는 아이를 보자 오전의 대로와 흥분이 옛날 영화 같았다. 이러면서 자라겠지, 이렇게 크는 거겠지. 더한 말대꾸도 하고 더 큰 반항도 하겠지. 그 모든 감정의 질풍노도까지 사랑하기로 한 부모니까 잘해보자. 나라고 안 그랬고, 우리 엄마라고 안 그랬겠니. 많이 자라고 많이 커져라. 마음도, 머리도 모조리.
벳푸의 숙소인 뉴츠루타 호텔로 향했다. 벳푸의 주인공과 다름없는 지옥 온천 순례를 할 것도 아니고, 밀월여행 온 듯 골목골목 손잡고 다닐 것도 아닌 일정이었다. 벳푸에 온 이유는 순전히 교통 때문. 수족관 우미타마고, 테마파크 하모니랜드에 빠르게 옮겨 다닐 수 있는 거점으로 제일 좋은 위치였다. 벳푸 역에서는 걸어서도 7, 8분이면 충분했고 버스터미널도 코앞에 있었다. 백화점도 호텔 앞 횡단보도만 건너면 있었고 밤에도 으슥하지 않고 낮에도 지나치게 붐비지 않았다. 짐을 맡겨두고 택시를 탔다. 이미 오후였고 따져보니 성인 2명의 버스비는 4명이 타고 가는 택시비보다 크게 싸지도 않았다. 시간과 편리가 돈보다 먼저라는 호새 엄마 여행 철학에 엄지를 세우며 따라나섰다.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http://img.khan.co.kr/lady/201412/20141204152239_4_kongkong4.jpg)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
그런데 우미타마고에 갈치가 없었다. 호새 엄마는 꿈꾼 거 아니냐며 깔깔거렸다. 멸치는 있었지만 그냥 힘찬 반짝임이 인상적인 작은 물고기 무리일 뿐이었다. 해파리는 예뻤다. 갈치가 없어도 아이들은 즐거웠다. 핼러윈데이를 맞아 배경을 바꿔놓은 작은 수조에 숨어들어 있는 손톱만 한 열대어를 보며 자리를 떠나지 못했고, 펭귄을 직접 따라다니고, 수달에게 먹이를 주고, 바다코끼리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웃어댔다. 넓지 않은 수족관을 샅샅이 둘러보고 좋아했다. 바다 생물 모양의 놀이터에서도 한참을 놀았다. 평일 오후에 찾아서였는지 데이트 중인 언니, 오빠 몇 명을 빼고는 아예 관람객이 없었다. 바다 생물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호새는 콩콩이의 손을 잡고 다니며 설명을 했고, 콩콩이는 그 뒤에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로 살을 붙였다. 퍼즐 한 판씩을 사서 손에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http://img.khan.co.kr/lady/201412/20141204152239_5_kongkong5.jpg)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
따로 식당에 차려준 가이세키 저녁은 좋았다. 아이들을 위한 비용을 따로 지불하고 제대로 4인상을 받았다. 이제는 자기 몫의 무엇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상에서 먹는 식사에 웃음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토마토파스타, 게 그라탱, 스테이크 등이 나왔지만 아이들은 엄마들을 위해 준비된 스키야키를 먹으며 “맛있다”를 연발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했고 곧바로 대욕장에 들어섰다. 노천탕도 있고 깊이가 여러 종류인 넓은 욕조가 있었다. 살갗이 빨갛게 되도록 아이들은 그 안에서 신나게도 놀았다. 푹신한 이불 속에서 푹 잠을 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http://img.khan.co.kr/lady/201412/20141204152239_6_kongkong6.jpg)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
마지막 날, 엄마들은 비장해졌다. 낮잠 시간에 잠을 재우기가 애매한 상태에서 아이들이 가장 잘 뛰어놀게 될 테마파크에 들르는 날이었다. 짐을 챙겨 프런트에 맡겨두고 전철을 타고 히지 역에 있는 하모니랜드로 향했다. 무민을 좋아하는 호새 엄마를 위해 내년도 무민 다이어리를 하나 샀고, 요구르트 좋아하는 콩콩이는 떠먹는 요거트, 호새는 호빵맨 젤리를 하나씩 챙겨 전철에 올랐다. 책 많이 보고 떠드는 사람 없다는 일본 전철인데 모두 스마트폰을 보고 떠드는 사람도 많았다. 어쩌다 “하필 유독 그런 칸에 탔나 보다”라며 엄마 둘은 웃었다. 히지 역에 내려서 다시 택시를 타고 하모니랜드로 향했다. 일본에 살지 않는다면, 아니 벳푸 지리에 능하지 않다면 여기를 찾아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러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더니 이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이렇게 많이 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꽉꽉 차 있었다. “얘들아, 너희 그런 옷 다 어디서 샀니?” “그렇게 하고 나갈 때 엄마들은 뭐라고 하시대?” 하고 묻고 싶은 키티 코스프레를 한 숙녀들이 무더기무더기였다. 아, 정말 다 어디서 샀을까? 나와서 메이크업 했을까? 아니면 집에서? 어찌나 그런 모습을 서로 좋아하고 스스로도 자랑스러워하던지 무척 인상적이었다.
호새와 콩콩이도 보폭이 좁아졌다. 타고 싶고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아서 호새는 말도 빨라졌다. 지금 우리 아이들의 나이가 아니라면 조금 시시할 만한 기구들이었다. 작은 놀이기구들도 모두 미취학 아동들에게나 환영받을 만한 수준이었는데, 우리나라 어린이들보다 순진하다는 일본 아이들은 그래서인지 함박웃음으로 부모의 카메라를 보고 있었다. 가자마자 밥부터 먹였다. 우리에게는 낮잠이라는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전에 먹이고 놀리고 쉬도 하게 하고 다 해야 했다. 세트로 시키면 물병도 주고 접이식 도시락도 주는 햄버거를 주문했다. 핑크 도시락에 물병이라 호새가 싫어할 줄 알았는데 콩콩이만큼이나 좋아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우리가 시켰다면 하지 않았을 춤이었지만 역시나 서로 누가 더 웃기나를 하다가 나온 상황이었다. 누가 이겼는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웃기는 아이들 둘을 우리가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점심, 엄마들은 뭘 먹어도 배가 안 부르고, 아무리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것도 확인한 점심이었다.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http://img.khan.co.kr/lady/201412/20141204152239_7_kongkong7.jpg)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
웬만한 놀이기구를 모두 섭렵하고 줄이 제일 길던 회전목마까지 타고 나자 콩콩이의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호새의 업어달라는 소리의 빈도가 잦아졌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콜택시를 기다리고, 전철을 타고, 역에서 내려 걸어 호텔로 가자니 저절로 10년은 늙는 것 같았다. 대륙적 기질을 지닌 호새 엄마의 “저녁 싼 거 먹고 택시 타자”라는 말에 “콜!”을 외쳤다. 그리고 저녁도 비싼 거 먹자고 했다. 하하. 아이들은 정말 달게 잤다. 아이들이 자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사진기에 담긴 아이들의 행복한 한때를 확인했다. 콩콩이는 ‘마이멜로디’를 진짜 만화에서 튀어나왔다고 생각했고, 긴장하며 다가가 안았다. 그리고 마이멜로디가 준 선물-엄마가 5백 엔을 주고 마이멜로디 만나는 줄에 섰으니 얻은 그 대가-을 얼마나 소중하게 쥐고 나오던지 뭉클할 정도였다.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다음에 만날 때는 더 큰 선물을 주겠다는 친구 마이멜로디의 말을 듣고 아이는 사슴 눈이 돼 있었다. 호새가 찍은 엄마들의 모습, 단풍, 관람차, 화장실 표지까지 사진작가를 시키자는 말을 하며 오후가 익어갔다.
아이들은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사건, 사고 하나 없이 그림같이 잘 따라줬다. 몇 주 뒤면 모두 잊을 기억일지는 몰라도 아직은 호새와 같이 갔던 우미타마고, 콩콩이와 함께했던 자동차 경주를 아이들은 입에 올린다. 엄마들은 함께한 기억으로 더 풍성한 관계를 가지게 됐고, 아이의 아빠들은 꼴랑 선물이랍시고 사온 채소 절임 ‘다카나’로 일본의 가을을 맛봤다.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http://img.khan.co.kr/lady/201412/20141204152239_3_kongkong3.jpg)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
하우스텐보스가 있는 사세보와 벳푸가 있는 오이타는 지도상으로 볼 때도 가깝지 않았다. 유명한 곳을 두루 살피며 도는 여행보다는 어디든 한 군데 머물러 아무것도 아닌 남의 집 담벼락 밑에서 그림자놀이나 하는 쪽인 나에게 편도 4시간이 족히 걸리는 여행지를 3박 일정 안에 집어넣는 일은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다. 이럴 때 하는 말. “자식이 뭐라고!” 콩콩이가 좋아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친구로서,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그 백배는 더 좋아지는 엄마로서 4시간, 그건 긴 시간이 아니었다. 호새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행을 가면 한 곳에 눌러앉는다는 호새 가족에게도 환승을 포함한 4시간 남짓의 기차 여행은 ‘도전’의 수준이라고 했다. 게다가 시간에 맞춰 움직일 수 없는 동행을 가진 우리가 선택한 여행 방식은 세월아, 네월아. 시간이 모두 길바닥에 뿌려지고 있었다.
Epilogue
여행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인생의 일정은 아니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모를 기쁨을 숨겨놓고 있기는 하다. 해본 사람은 알지만 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기쁨. 그 비슷한 것을 다른 것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목적지는 상관없다. 마을버스 한 정거장 거리의 이웃 동네여도,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마주한 나라여도. 일상을 떠났다는 것. 거기에서 마주하는 일상과 전혀 상관없지만 내 일상과 착 달라붙어 있는 새로운 일상. 그 괴리와 밀착에서 오는 길항은 여행을 떠나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그래서 더욱 해볼 만하다. 아이의 일상, 나의 일상. 같아도 같지 않은 그 차이가 여행지에서는 더 극명해지거나 아예 소실되기도 한다.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http://img.khan.co.kr/lady/201412/20141204152239_8_kongkong8.jpg)
[콩콩이는 여행 중]열다섯 번째 여정지 - 일본 오이타
Profile 콩콩이는…
2011년생. 말 잘하고 밥 잘 안 먹는 여자아이. 잡지사 편집장 엄마에게서 태어난 덕과 탓에 생후 6개월부터 뉴욕행 비행기를 타기 시작해 현지의 시차와 상관없이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눕는 여행형 어린이로 성장 중.
콩콩이 엄마는…
「GQ」, 「W」의 피처 디렉터, 「Off」, 「magazine C」, 「RAUME」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한 끼의 식사가 지닌 의미와 그 사이의 감정들을 두루 쓴 「더 테이블」을 펴내기도 했다. 이따금 텔레비전과 라디오에도 나왔지만 지금은 잡지 「ojo」와 「magazine K」의 편집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 ‘콩콩이는 여행 중’은 이달을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글&사진 / 조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