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조 때는 섬이 되고 간조 때는 뭍이 되는 간월암은 물때에 따라 암자로 드는 방법이 다르다.
이른 봄, 산중 암자에 방 한 칸을 얻어 두어 달 묵은 적이 있다. 매화가 벙글고 산수유가 번졌다는 소식은 산 아랫동네의 이야기일 뿐, 산사의 봄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엔 새순이 움트는 대신 잔설이 덮여 있었고, 바닥이 절절 끓는 방 안에서도 창틈을 파고드는 삭풍에 코끝이 시렸다. 낯선 방에 대한 신고식이었을까. 처음 며칠은 얕은 잠 속에 끝도 없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엔 늘 바닷물이 스몄다. 암자 뒤꼍에 웃자란 산죽 때문이었다. 봄을 시새우는 성마른 바람은 밤새도록 대밭을 들쑤셔댔고, 울울창창한 대밭은 거친 파도 소리를 토해냈다. 문을 열면 바다가 펼쳐질 것 같았다. 파도 소리를 베고 누워 멀미 나도록 일렁이는 꿈자리에 내내 뒤척이다가, 가지런한 목탁 소리에 눈 뜨던 새벽 3시. 꼭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 있어야 섬이 아님을, 심심산골 작은 절집에서 알았다.

목조 보살상을 지나 간월암으로 드는 길. 일주문이 소박하다.

간월도에서 바라본 바다. 만조 때의 간월암은 앞마당 뒷마당 모두 바다다.

바위섬 위에 오뚝한 암자의 살림은 검박하기 그지없다.

간월암으로 드는 길 내내 작은 소망탑이 이어진다.
사막이 끝난 자리에 바다가 펼쳐졌다
숱한 해수욕장으로 명성을 누려온 태안이지만, 이곳의 숨은 비경으로 ‘사막’이 손꼽힌다는 건 꽤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종종 이색적인 여행지를 소개하는 기사와 블로그를 통해 머나먼 열사의 땅에서 찍어온 듯 이국적인 풍경 사진을 접했고, 사막을 횡단한 소감을 읽었다. 여행기의 제목이나 사진 설명엔 ‘서해안에 사막이 있다? 없다?’와 같은 문장이 으레 따라붙곤 했다.

해안사구에 물결치는 바람의 무늬. 바람의 무늬는 천변만화한다.

모래사막을 가로지르자 겨울 바다가 나타났다.
해와 나그네 외투 벗기는 내기라도 벌인 것처럼 인정사정없는 바닷바람이 온몸의 숨구멍으로 스며들었다. 생태계의 보고라지만 맵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 사구에서 생명체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마른 풀들만 버석거릴 뿐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모래의 움직임에 가장 신바람이 실리는 때는 겨울이다.

천리포수목원의 숲길은 해변 산책로로 이어진다. 천리포 해변을 바라보는 쉼터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답다.
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를 찾아서
‘서해안의 푸른 보석’이라 불리는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리 잡았다. 2009년 일반에게 공개되기 전 천리포수목원의 별명은 ‘신의 비밀정원’이었다. 허락을 받은 식물 연구자나 후원 회원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국내 최초의 사립 수목원을 일군 설립자 고 민병갈 원장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나무가 주인인 수목원’을 지향했다. 자신의 묘를 쓰지 말고 묘 쓸 땅에 나무 하나라도 더 심으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2012년 서거 10주기를 기념하며 그의 유골은 수목원 내 목련나무 아래 안치됐다. 생전에 그가 가장 좋아했던 나무다. 현재 옛 무덤 자리에는 민 원장의 흉상이 놓여 있고, 인근에는 그가 국내 최초로 발견한 완도호랑가시나무가 서 있다.

민병갈 원장의 흉상 인근에는 그가 국내 최초로 발견한 완도호랑가시나무가 서 있다.
현재 천리포수목원엔 1만5,755종의 식물이 식재돼 있다. 그중에서도 목련류는 400여 종으로 세계 최대 규모다. 2020년 국제 목련학회 총회가 이곳에서 열리는 것도 이 때문. 대다수의 수목원이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 인공적으로 조성된 반면, 천리포수목원은 나무를 중심으로 놓고 관람객들이 움직이도록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해안가 언덕에 심은 나무들은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보기 좋게 모양을 잡고자 가지치기를 하거나 관람객의 보행이 편하도록 꽃과 나무를 정리하는 법이 없다. 수목원 탐방로는 숲길을 지나 바다로 이어진다. 천리포 해변과 낭새섬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다.

황홀한 향기를 가진 납매는 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일찍 꽃이 피었다. 꽃보다 화려한 붉은 열매를 지닌 호랑가시나무 군락은 천리포수목원의 ‘겨울 정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다. 지난여름의 잔해라기엔 존재감이 무척이나 또렷한 마른 수국은 품위 있게 늙은 노인 같다.
하지만 이날의 목적은 노란 복주머니를 닮은 납매(臘梅)를 찾는 것. 천리포수목원으로부터 날아든 올해의 첫 꽃 소식은 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다. 혹한 속에 가장 먼저 꽃 소식을 전한다 하여 ‘화신(花信)’이라고도 하고, 추위를 뚫고 찾아오는 손님에 비유해 ‘한객(寒客)’이란 별명으로도 불리는 납매는 한겨울에 피어나는 귀한 꽃이다. 너도밤나무 옆에 피었다는 정보 하나로 출발한 탐매행(探梅行)은 엄지손톱만 한 노란 꽃송이 앞에서 완결됐다. 매서운 추위 속에 곤충을 유혹하고자 강한 향기를 내뿜는 것이 특징이라더니, 과연 향기로 존재하는 꽃이었다. 생강처럼 알싸한 향이 코끝을 뚫자,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 왔다 갔다. 찰나였다.
Tip 서산&태안 여행에서 놓치기 아쉬운 풍경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얼굴 가득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어 일명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주소 충남 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길 65-13
운영 시간 오전 9시~오후 6시(연중무휴, 7~8월은 오후 9시까지 연장 운영) 문의 041-660-2538

1 이원방조제에서 바라본 철새의 군무. 새들의 낙원은 사람에게도 낙원이다. 2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어 관광명소로 떠오른 대하랑꽃게랑 해상 인도교.
주소 충남 태안군 이원면 관리
대하랑꽃게랑 다리 드르니항과 백사장항을 잇는 길이 250m의 해상 인도교로, 꽃게 모양을 형상화한 다리가 재미있다. 해가 지면 다리에 밝혀진 조명이 어선들의 휘황한 불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야경을 선사한다. 주소 충남 태안군 남면 신온리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