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충남 서산·태안 - 시간이 빚은 서쪽 정원에 갔다

정원 여행자

(2)충남 서산·태안 - 시간이 빚은 서쪽 정원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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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운행 주기에 따라 간월암의 앞뜰과 뒤뜰은 바다가 됐다가 갯벌이 된다. 바람은 모래를 실어와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며 거대한 모래언덕을, 시간의 퇴적층을 빚었다. 황무지를 개간해 나무를 심은 한 사람의 열정은 40년이 지나 ‘서해안의 푸른 보석’으로 빛을 발하고 있다. ‘시간’이 빚은 이 모든 기적을 만나러 서해에 갔다.

만조 때는 섬이 되고 간조 때는 뭍이 되는 간월암은 물때에 따라 암자로 드는 방법이 다르다.

만조 때는 섬이 되고 간조 때는 뭍이 되는 간월암은 물때에 따라 암자로 드는 방법이 다르다.

간월암의 정원은 갯벌이거나 바다다
이른 봄, 산중 암자에 방 한 칸을 얻어 두어 달 묵은 적이 있다. 매화가 벙글고 산수유가 번졌다는 소식은 산 아랫동네의 이야기일 뿐, 산사의 봄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엔 새순이 움트는 대신 잔설이 덮여 있었고, 바닥이 절절 끓는 방 안에서도 창틈을 파고드는 삭풍에 코끝이 시렸다. 낯선 방에 대한 신고식이었을까. 처음 며칠은 얕은 잠 속에 끝도 없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엔 늘 바닷물이 스몄다. 암자 뒤꼍에 웃자란 산죽 때문이었다. 봄을 시새우는 성마른 바람은 밤새도록 대밭을 들쑤셔댔고, 울울창창한 대밭은 거친 파도 소리를 토해냈다. 문을 열면 바다가 펼쳐질 것 같았다. 파도 소리를 베고 누워 멀미 나도록 일렁이는 꿈자리에 내내 뒤척이다가, 가지런한 목탁 소리에 눈 뜨던 새벽 3시. 꼭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떠 있어야 섬이 아님을, 심심산골 작은 절집에서 알았다.

목조 보살상을 지나 간월암으로 드는 길. 일주문이 소박하다.

목조 보살상을 지나 간월암으로 드는 길. 일주문이 소박하다.

고독한 모든 자리가 섬이라면, 간월암은 섬 중의 섬이다. 작은 암자가 저만큼 작은 섬 하나를 온전히 점하고 있어 절이 섬이요, 섬이 곧 절이다.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작은 바위섬 위에 자리 잡은 간월암은 고려 말 무학대사가 창건한 암자라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수도하던 중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무학대사는 암자 이름도 ‘간월암(看月庵)’이라 지었다. 한때는 피안사(彼岸寺) 혹은 연화대(蓮花臺)로 불렸다는데, 달을 보며 바다 위에 한 점 섬으로 떠 있는 암자의 풍경은 강 건너 극락정토와 연꽃의 이미지로 읽힐 만도 하다.

간월도에서 바라본 바다. 만조 때의 간월암은 앞마당 뒷마당 모두 바다다.

간월도에서 바라본 바다. 만조 때의 간월암은 앞마당 뒷마당 모두 바다다.

절집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도록, 눈길 닿는 곳마다 바다다. 물론 만조 때의 이야기다. 바다를 앞마당, 뒷마당으로 두른 암자에서 할 일이란 바다 위로 해가 뜨고 바닷속으로 해가 지고, 달이 부풀었다 야위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뿐. 몇 발자국씩 의자를 옮기며 종일토록 해 지는 풍경을 마흔세 번이나 바라봤다는 어린 왕자처럼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서해의 섬은 썰물과 밀물 덕분에 소혹성 B612보다는 덜 외롭다. 물이 빠지면 육지와 이어진 길이 드러나고,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이때 간월암의 마당은 바다가 아닌 갯벌이다. 소라, 고동, 방게를 비롯해 새조개와 굴을 채취할 수 있는 황금 어장이라, 이 일대 밥상을 책임진다. 갯벌이 품은 생명엔 사람도 포함된다. 굴을 캐서 그 돈으로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친 숱한 이들이 그 증거다. 간월도 어리굴젓은 임금의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무학대사가 맛을 보고 감탄해 태조 이성계에게 진상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바위섬 위에 오뚝한 암자의 살림은 검박하기 그지없다.

바위섬 위에 오뚝한 암자의 살림은 검박하기 그지없다.

물때에 따라 암자로 드는 방법이 다르다. 물이 차면 줄배를 이용하고 물이 빠지면 걸어서 갈 수 있다. 우리가 공유했던 한 시절이 서로 다른 추억으로 남듯 간월암을 만조에 찾은 당신과 간조에 찾은 나의 기억은 어긋나게 마련이다. 밀물과 썰물은 달의 운행과 관련된다. 달을 바라보는 암자의 앞뜰과 뒤뜰이 바다가 되거나 갯벌이 되는 것도 달과의 관계 속에 결정된다.

간월암으로 드는 길 내내 작은 소망탑이 이어진다.

간월암으로 드는 길 내내 작은 소망탑이 이어진다.


사막이 끝난 자리에 바다가 펼쳐졌다
숱한 해수욕장으로 명성을 누려온 태안이지만, 이곳의 숨은 비경으로 ‘사막’이 손꼽힌다는 건 꽤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종종 이색적인 여행지를 소개하는 기사와 블로그를 통해 머나먼 열사의 땅에서 찍어온 듯 이국적인 풍경 사진을 접했고, 사막을 횡단한 소감을 읽었다. 여행기의 제목이나 사진 설명엔 ‘서해안에 사막이 있다? 없다?’와 같은 문장이 으레 따라붙곤 했다.

해안사구에 물결치는 바람의 무늬. 바람의 무늬는 천변만화한다.

해안사구에 물결치는 바람의 무늬. 바람의 무늬는 천변만화한다.

‘서해안의 사막’으로 통하는 신두리 해안사구는 태안반도 서북부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거대한 모래언덕이다. 길이 3.4km, 너비 500~1,300m에 달하는 규모에, 해안사구의 교과서라 할 만큼 다양한 종류의 사구 지형이 존재한다. 갯씀바귀, 초종용, 해당화, 갯방풍, 표범장지뱀은 물론 멸종위기종인 금개구리, 쇠똥구리 등 희귀한 동식물의 서식처로 학술적·생태적 가치가 높다. 하여 2001년 천연기념물 제431호로 지정된 이래 그 이듬해엔 해양수산부가 사구 주변 바다를 ‘해양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정했으며, 환경부는 사구 안의 두웅습지 일대를 ‘습지보전지역’으로 보호하고 있다.

모래사막을 가로지르자 겨울 바다가 나타났다.

모래사막을 가로지르자 겨울 바다가 나타났다.

모래언덕은 파도와 바람이 빚고, 시간이 깃든 작품이다. 파도가 고운 모래를 해안가에 실어 놓으면 겨울철 세찬 북서풍이 모래를 육지로 옮긴다. 모래는 바람에 의해 쌓이고 깎이고 또 쌓이면서 언덕을 이룬다. 무려 1만5,00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의 퇴적층이다.

해와 나그네 외투 벗기는 내기라도 벌인 것처럼 인정사정없는 바닷바람이 온몸의 숨구멍으로 스며들었다. 생태계의 보고라지만 맵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 사구에서 생명체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마른 풀들만 버석거릴 뿐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모래의 움직임에 가장 신바람이 실리는 때는 겨울이다.

천리포수목원의 숲길은 해변 산책로로 이어진다. 천리포 해변을 바라보는 쉼터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답다.

천리포수목원의 숲길은 해변 산책로로 이어진다. 천리포 해변을 바라보는 쉼터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답다.

모래언덕에 푹푹 발목을 묻으며 현재진행형의 ‘샌드 아트’를 감상했다. 깊었다가 얕았다가, 잔잔했다가 격했다가, 모래언덕을 캔버스 삼아 바람이 새긴 물결무늬는 쉼 없이 변주됐다. 양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찬 듯 무거운 발걸음으로 바람의 언덕을 가로질러 마침내 사막의 끝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맞닥뜨린 겨울 바다 앞에 볼멘소리를 꿀꺽 삼켰다. 진격하듯 우-우- 몰려오는 짙푸른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이, 모래바람에 뻑뻑해진 안구를 적셨다.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를 찾아서
‘서해안의 푸른 보석’이라 불리는 태안의 천리포수목원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리 잡았다. 2009년 일반에게 공개되기 전 천리포수목원의 별명은 ‘신의 비밀정원’이었다. 허락을 받은 식물 연구자나 후원 회원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국내 최초의 사립 수목원을 일군 설립자 고 민병갈 원장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나무가 주인인 수목원’을 지향했다. 자신의 묘를 쓰지 말고 묘 쓸 땅에 나무 하나라도 더 심으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2012년 서거 10주기를 기념하며 그의 유골은 수목원 내 목련나무 아래 안치됐다. 생전에 그가 가장 좋아했던 나무다. 현재 옛 무덤 자리에는 민 원장의 흉상이 놓여 있고, 인근에는 그가 국내 최초로 발견한 완도호랑가시나무가 서 있다.

민병갈 원장의 흉상 인근에는 그가 국내 최초로 발견한 완도호랑가시나무가 서 있다.

민병갈 원장의 흉상 인근에는 그가 국내 최초로 발견한 완도호랑가시나무가 서 있다.

민 원장은 푸른 눈의 한국인이다. 1945년 그의 나이 24세에 미군 정보장교로 한국에 왔다가 이 땅의 매력에 빠져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사재를 털어 천리포 해변 대지를 매입하게 된 이유도 자못 흥미롭다. 1962년 태안을 찾은 그에게 한 노인이 다가와 “딸을 시집보내야 하는 데 돈이 없다”라며 “땅 2,000평을 사달라”라고 부탁했다는 것. 민 원장은 흔쾌히 노인의 땅을 사들였고, 이를 계기로 차츰차츰 그 일대 땅을 매입하며 1970년 본격적으로 수목원 조성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국내 자생종을 주로 심다가 차츰 외국의 다양한 묘목과 종자도 들였다. 전공자는 아니었지만 두툼한 식물도감이 나달나달해지도록 읽고 연구하며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을 개간해 초록을 입혔다.

현재 천리포수목원엔 1만5,755종의 식물이 식재돼 있다. 그중에서도 목련류는 400여 종으로 세계 최대 규모다. 2020년 국제 목련학회 총회가 이곳에서 열리는 것도 이 때문. 대다수의 수목원이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 인공적으로 조성된 반면, 천리포수목원은 나무를 중심으로 놓고 관람객들이 움직이도록 조성된 것이 특징이다. 해안가 언덕에 심은 나무들은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보기 좋게 모양을 잡고자 가지치기를 하거나 관람객의 보행이 편하도록 꽃과 나무를 정리하는 법이 없다. 수목원 탐방로는 숲길을 지나 바다로 이어진다. 천리포 해변과 낭새섬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다.

황홀한 향기를 가진 납매는 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일찍 꽃이 피었다. 꽃보다 화려한 붉은 열매를 지닌 호랑가시나무 군락은 천리포수목원의 ‘겨울 정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다. 지난여름의 잔해라기엔 존재감이 무척이나 또렷한 마른 수국은 품위 있게 늙은 노인 같다.

황홀한 향기를 가진 납매는 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일찍 꽃이 피었다. 꽃보다 화려한 붉은 열매를 지닌 호랑가시나무 군락은 천리포수목원의 ‘겨울 정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다. 지난여름의 잔해라기엔 존재감이 무척이나 또렷한 마른 수국은 품위 있게 늙은 노인 같다.

정월에 찾은 수목원엔 미묘한 색감과 형태로 사계절이 공존했다. 먼저, 연못가를 둘러싼 수국은 지난여름의 잔해로 치부하기엔 그 존재감이 또렷했다. 바삭하게 마른 자잘한 연갈색 꽃잎들을 흩뿌리지도 부서뜨리지도 못한 채 애먼 가지나 흔들고 있는 겨울바람이 외려 지쳐 보였다. 동백이 절정에서 자결로 극적인 비장미를 돋운다면, 철 지난 수국엔 세월을 견뎌낸 결연함이 있다. 가을꽃 억새의 은빛 물결은 여전히 탐스러웠고, 겨울 정원의 대표 얼굴인 호랑가시나무 군락은 꽃보다 붉은 열매로 새들을 유혹했다. 호랑가시나무에 홀리는 것은 새들만이 아니다. 겨울에 천리포수목원을 찾는 이들 대부분이 호랑가시나무 군락으로 흘러든다.

하지만 이날의 목적은 노란 복주머니를 닮은 납매(臘梅)를 찾는 것. 천리포수목원으로부터 날아든 올해의 첫 꽃 소식은 음력 12월에 피는 매화다. 혹한 속에 가장 먼저 꽃 소식을 전한다 하여 ‘화신(花信)’이라고도 하고, 추위를 뚫고 찾아오는 손님에 비유해 ‘한객(寒客)’이란 별명으로도 불리는 납매는 한겨울에 피어나는 귀한 꽃이다. 너도밤나무 옆에 피었다는 정보 하나로 출발한 탐매행(探梅行)은 엄지손톱만 한 노란 꽃송이 앞에서 완결됐다. 매서운 추위 속에 곤충을 유혹하고자 강한 향기를 내뿜는 것이 특징이라더니, 과연 향기로 존재하는 꽃이었다. 생강처럼 알싸한 향이 코끝을 뚫자, ‘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이 왔다 갔다. 찰나였다.

Tip 서산&태안 여행에서 놓치기 아쉬운 풍경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힌다. 얼굴 가득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어 일명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주소 충남 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길 65-13
운영 시간 오전 9시~오후 6시(연중무휴, 7~8월은 오후 9시까지 연장 운영) 문의 041-660-2538

1 이원방조제에서 바라본 철새의 군무. 새들의 낙원은 사람에게도 낙원이다. 2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어 관광명소로 떠오른 대하랑꽃게랑 해상 인도교.

1 이원방조제에서 바라본 철새의 군무. 새들의 낙원은 사람에게도 낙원이다. 2 바다 위를 걷는 듯한 신기한 체험을 할 수 있어 관광명소로 떠오른 대하랑꽃게랑 해상 인도교.

이원방조제 학암포해수욕장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국내 최장 길이의 벽화가 그려진 이원방조제를 볼 수 있다. 2007년 태안 기름 유출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 손을 보탠 130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기리고자 2.7km 구간을 가득 채운 희망의 벽화다.
주소 충남 태안군 이원면 관리

대하랑꽃게랑 다리 드르니항과 백사장항을 잇는 길이 250m의 해상 인도교로, 꽃게 모양을 형상화한 다리가 재미있다. 해가 지면 다리에 밝혀진 조명이 어선들의 휘황한 불빛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야경을 선사한다. 주소 충남 태안군 남면 신온리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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