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의 명소 죽녹원은 16만㎡에 달하는 울창한 대숲의 위용을 자랑한다.
담양의 첫 기억은 대통밥과 댓잎술이다. 담양에 도착하자마자 그걸 먹기 위해 간 것처럼 대통밥 정식으로 유명한 식당부터 찾았다. ‘담양’이란 지명을 떠올릴 때마다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푸른 대숲 이미지가 식욕 중추에도 영향을 미친 까닭이다. 전라도 밥상을 앞에 두고 흐뭇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맑고 순한 댓잎술로 반주도 걸쳤겠다, 걸음걸이에 절로 탄력이 붙을 만큼 기분 좋은 취기에 젖어 죽녹원으로 향했다.
담양군이 성인산 일대에 조성한 죽녹원은 16만㎡에 달하는 거대한 대나무 정원이다.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등 8가지 주제의 산책로로 구성돼 있는데, 어느 길을 걸어도 울창한 대숲 속에서 죽림욕을 즐길 수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담양천과 수령 300년이 넘은 고목들로 조성된 관방제림,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등 담양의 명소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970년대 초반 전국적인 가로수 조성사업 때 담양군이 3, 4년생 메타세쿼이아 묘목을 심은 것이 현재의 울창한 가로수 터널길이 됐다.
추위와 더위가 닥쳐도 용납하지 않고 / 해를 더할수록 더욱 절개를 가다듬고 /
날이 오랠수록 더욱 마음을 비우네 / 달빛 아래서는 맑은 그림자 일렁이고 /
바람 앞에서는 청정한 소리 보내나니 / 거기다 하얀 눈을 이게 되면 / 대숲은 뛰어난 운치가 이뤄지네
하지만 복효근 시인의 ‘어느 대나무의 고백’처럼, 대숲의 위엄 뒤에 가려진 절절한 속사정을 짚어볼 만도 하다.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 고백컨대 /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중략)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2002 아름다운 거리숲’ 대상과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중생대의 나무를 우러르며
담양의 나무들은 제 몸을 쭉쭉 뻗어 올려 하늘과 소통하는 것이 특징일까.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에서 또 한 번 하늘을 우러러본다. 양쪽으로 도열한 10~20m 높이의 아름드리나무들이 짙푸른 녹음을 드리우며 위용을 자랑한다. 메타세쿼이아 나무는 마지막 빙하기 이후 사라져 은행, 소철 등과 함께 화석으로 종종 발견됐기 때문에 ‘화석나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공룡의 시대에 어울릴 법한 사이즈. 유전자에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무늬를 아로새긴 나무와 한 시절을 공유한다는 것은 꽤나 가슴 벅찬 일이다.
1 창평면 삼지내 마을은 고유의 생활방식과 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2 슬로시티의 특성을 살린 한옥 민박집이 정겹다. 3 돌담을 따라 굽이굽이 걷다 보면 100년도 넘은 전통 한옥을 만날 수 있다.
중생대의 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고장답게 담양엔 세월의 깊이가 오롯하다.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창평면 삼지내 마을로 드는 길. 마을 입구를 지키고 선 2층 누각 남극루는 16세기 초에 형성된 마을을 조망하고 있다. 월봉천과 운암천, 유천 3개의 물줄기가 마을로 모여 흐른다고 해서 ‘삼지내’라 이름 한 마을은 아직도 수세기 전의 평화로운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자연을 뜰 안에 들이되 나무 한 그루, 물길 하나 의미 없이 조성한 것이 없다.
돌담길 중간중간 ‘창평전통쌀엿’이라는 간판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데, 바삭바삭한 식감에 쩍쩍 들러붙지 않는 창평쌀엿은 임금님 진상품으로도 유명하다. 창평이 슬로시티로 지정된 데는 전통 방식을 고수해 만드는 먹을거리들이 톡톡히 한몫을 담당했다. 대를 이어 만드는 창평쌀엿과 창평한과, 장날 창평시장에서 먹으면 좋을 창평국밥 등이 그것. 또 종가집 며느리가 빚어내는 된장, 고추장도 슬로시티를 대표하는 웅숭깊은 맛이다. 창평면 유천리에 있는 기순도 명인의 집 장독대에선 구수한 냄새가 솔솔 피어난다. ‘치타슬로 국제연맹’이 창평을 슬로시티로 지정하며 극찬한 명인의 전통 장은 죽염을 기본 재료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360여 년을 이어온 고씨 문중의 10대 종부로, 세월의 내공을 품은 슬로푸드의 진수를 보여준다. 500여 개의 장독 중에는 대대손손 물려 내려온 씨간장독도 있다 하니, 과연 전통의 장맛이라 자부할 만하다.
뜨거운 여름 볕을 잠시 피해갈 요량으로 한옥 민박집의 대문을 열었다. 슬로시티를 구경 왔다는 객에게 기꺼이 툇마루를 내준 민박집 안주인은 땀이나 식히고 가라며 얼음 동동 띄운 오미자차까지 내어준다. 짱짱한 볕 아래 바삭하게 말라가는 하얀 이불 홑청을 바라보며 툇마루에 앉아 오미자차를 마시는 오후란 여름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1 주인의 처소인 제월당은 광풍각 뒤편에 자리 잡았다. ‘비 갠 뒤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을 뜻하는 ‘광풍제월(光風霽月)’ 중 밝은 달에 해당한다. 2 작은 규모지만 폭포까지 갖춘 정원은 무릉도원과 같다. 3 3면 문짝을 활짝 들어 올리면 호방한 기개마저 느껴지는 광풍각. 대숲에 이는 바람과 계곡 물소리가 막힘없이 흐르는 사랑방이다.
한국의 정원은 자연을 모방하거나 축소하기보다 자연 자체를 뜰 안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와 같은 정원 미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곳이 담양의 소쇄원이다. 소쇄원은 1530년경 조선의 선비 양산보가 지은 별서 원림으로, 별서(別墅)란 살림집에서 떨어져 산수 좋은 곳에 마련한 주거공간을, 원림(園林)은 인공적인 조경을 삼가고 동산과 숲의 자연미를 살려 조성한 뜰을 이른다. 15세에 조광조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양산보는 스승이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그 충격으로 고향에 은둔한다. 이것이 청년 선비가 출세의 꿈을 접고 창암촌 계곡에 소쇄원을 꾸미게 된 계기다. 맑을 소(瀟), 깨끗할 쇄(灑). 양산보는 이 ‘소쇄’라는 말을 좋아해 자호도 소쇄옹(瀟灑翁)이라 했다. 그는 한평생 소쇄원을 가꾸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 및 문인들과 교류를 즐겼는데 김인후,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대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 계곡 건너편에 자리 잡은 3칸 팔작지붕의 정자가 사랑방의 역할을 했던 광풍각이다.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읊은 김인후의 「소쇄원 48영(詠)」 중 제2영 ‘침계문방(枕溪文房)’에 해당하는 곳인데, 개울을 베고 누운 선비의 방을 뜻한다. 문이 닫혀 있을 땐 고졸한 암자 같지만 3면 문짝을 활짝 들어 올리면 호방한 기개마저 느껴진다. 대숲에 이는 바람과 계곡 물소리가 막힘없이 흐르는 가운데, 시와 술과 이야기는 햇빛이 달빛으로 바뀌도록 계속됐을 것이다. 주인이 거처하는 제월당은 광풍각 뒤편, 소쇄원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다. 이 역시 3칸짜리 소박한 규모의 집이다. ‘비 갠 뒤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을 뜻하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을 이름으로 나눠 가진 두 채의 건물 모두 소쇄하기 그지없다.
그 맑은 기운이 깃들까 싶어 광풍각 마루에 앉아 「소쇄원 48영」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시 한 수 읽고, 그 대상을 두리번거리며 더듬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제 삶의 뜨락에 무릉도원을,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일일까. 물길 하나 틀 때도, 꽃나무 한 그루 심을 때도 의미를 부여한 소쇄옹의 촘촘한 무릉도원에서, 은둔자의 뜨거운 가슴과 언어를 짐작해볼 따름이다. 자연 그대로인 듯하지만 실은 한 사람의 세계관과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는 섬세한 세공품이다.
담양은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소쇄원에서 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도로변,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식영정(息影亭)은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이 탄생한 곳. 주변 경치가 무척이나 아름다워 ‘그림자도 쉬어간다’라는 이름이 붙은 정자다. 담양은 식영정 외에도 송강정, 독수정 원림, 면앙정, 명옥헌 원림 등 도처에 누각과 정자가 숱한 고장이다. 기본적으로 누정은 수려한 경관 속에 자리 잡게 마련. 누정 순례만 해도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담양은 연못 담(潭)에 볕 양(陽) 자를 쓴다. 담양문인협회가 최근 발간한 시집 제목이 ‘햇살연못’인 이유도 그래서다. 대숲은 사계절 푸르고 메타세쿼이아는 사계절 공히 장관이라지만, 그럼에도 담양은 연못에 가장 풍성한 볕이 드는 여름이 제철이다. 제 이름자에 새겨진 아름다움의 내력이 그러하다.
[정원 여행자] 전남 담양 - 여름 담양으로의 자명한 산책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안쪽에 위치한 명옥헌 원림은 소쇄원과 함께 조선시대 민간 정원의 백미를 보여준다. 넓은 뜰에 고졸한 정자와 시냇물, 노송이 조화를 이룬 가운데, 연못을 에워싼 20여 그루의 백일홍나무가 압권이다. 진홍빛으로 타오르는 한여름의 꽃나무는 8월이 적기라지만, 이름처럼 개화 시기가 길다 하니 여름 내 한 번쯤 찾아볼 만하다.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