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릿느릿 장대로 밀면서 나아가는 거룻배는 우포늪의 시적인 풍경을 완성한다.

여름날 우포늪엔 마름, 자라풀, 개구리밥 등의 수생식물로 진초록 융단이 깔린다.

장재마을의 무성한 왕버들 군락은 원시 자연의 멋을 선사한다.
![[정원 여행자] 경남 창녕 - 새들은 우포에 와서 잠든다](http://img.khan.co.kr/lady/201508/20150803164149_4_chang_neung4.jpg)
[정원 여행자] 경남 창녕 - 새들은 우포에 와서 잠든다

창녕박물관 인근에 펼쳐진 교동·송현동 고분군. 옛날 6가야 중 하나인 비화가야 왕들의 묘역이다.
우포(소벌)·목포(나무벌)·사지포(모래벌)·쪽지벌을 총칭하는 우포늪은 창녕군 낙동강가의 4개 면(유어면·이방면·대합면·대지면)에 걸쳐 펼쳐져 있다. 총면적은 70만 평, ‘우포늪생명길’이라 이름 지은 탐방로는 12km 남짓하다. 탐방에 앞서 우포늪생태관을 먼저 둘러볼 것을 권한다. 현장감 있는 영상과 입체 모형,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1,000여 종에 달한다는 우포늪의 동식물들과 습지 생태를 예습할 수 있다. 그 계절에 만날 수 있는 대표 생물군 몇 종류의 이름만 알고 가도 보이는 풍경이 달라질 것이다.
생태 해설을 요청해 해설사와 함께 걷는 것도 좋겠다. 줄, 창포, 매자기 등 그저 ‘물풀’이라 통칭하던 물가 식물들의 고유한 이름을, 늘 헷갈리는 억새와 갈대의 확실한 구별법을 알려준다. 말끝마다 물음표를 달고 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저건 뭐예요?”를 연발하며, 답으로 돌아온 나비잠자리, 꼬리명주나비, 야관문, 흰뺨검둥오리 등의 이름을 새기는 시간이 꽤 행복하다. 간혹 풀숲이 급박하게 쑤석대는 소리에 놀라기도 하지만, 사람 발자국 소리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고라니일 가능성이 크므로 조용히 지나쳐주자. 콩알 같은 고라니 똥이 흔한 길이다.

관룡사는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수려한 관룡산의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
한여름, 우포의 주인공은 가시연이다. 온몸에 가시가 돋친 가시연꽃은 자생지가 10여 군데뿐인 희소 식물로, 국내 식물 중 잎이 가장 크다. 잎의 지름이 크게는 2m에 달할 정도. 8월 말경, 가시투성이 잎을 뚫고 아기 주먹만 한 꽃송이를 밀어 올리는데, 귀하게 틔운 꽃도 꽃이지만 너른 잎을 펼쳐 늪을 완전히 점거한 풍경이 장관이다.
밤이 되면 새들은 우포에 와서 잠든다. 해오라기, 중대백로, 왜가리와 같은 여름 철새들의 해 질 무렵 저공비행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저들에게도 생존을 위한 치열한 분투가 있겠지만, 안식처로 깃드는 날갯짓은 유유자적하다. 하지만 울음소리는 퍽이나 요란하다. 왜가리가 평안도에서 ‘왁새’라 불리는 이유도 그 울음소리 때문이라 한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라는 소설 제목처럼, 꾀꼴꾀꼴 울어 꾀꼬리요, 뻐꾹뻐꾹 울어 뻐꾸기이며, 왁왁 울어 왁새다.

영상과 입체 모형,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우포늪의 동식물들과 습지 생태를 공부할 수 있는 우포늪생태관.
죽은 왕의 무덤은 산 자의 정원이다
창녕은 우포늪을 통해 생태 여행의 메카로 잘 알려졌지만,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유적과 문화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8,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국내 최고(最古)의 목선(木舟)이 출토된 부곡면 비봉리 신석기 유적지를 비롯해 고인돌과 고분, 진흥왕 척경비, 석빙고, 관룡사 대웅전과 같은 문화재들이 도처에 산재한다.
창녕박물관은 역사 유적 탐방의 출발점이다. 고분군에 관한 복원과 전시로 특화된 박물관인데, 1,500여 년 전 16세에 순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소녀의 인골을 복원한 ‘송현이’가 눈길을 끈다. ‘송현이’는 인골 출토 지역인 송현동의 지명을 이용해 보다 친근하게 부르고자 붙인 애칭. 관습과 신분의 굴레에 묶여 성장판이 채 닫히기도 전에 산 채로 묻힌 1,500년 전 순장 소녀의 사연은 애처로움을 넘어 참혹하다.
박물관 인근에 펼쳐진 교동·송현동 고분군은 오솔길을 따라 산책하듯 둘러보기 좋다. 이 고분군은 옛날 6가야 중 하나인 비화가야(比火伽耶) 왕들의 묘역으로, ‘비화’는 빛벌, 즉 ‘빛이 좋은 들판’을 뜻한다. 빛 좋은 들판, 그중에서도 가장 양지바른 자리에 작은 동산 규모로 솟은 봉분 사이로 손을 맞잡은 연인이,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어머니가 지나간다. 어느 도시에서나 옛 왕들의 무덤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정원이 되게 마련이다. 생전에 누린 영화와 권세로도 모자라 무덤 속까지 진귀한 보물과 백성들을 산 채로 끌고 들어간 권력자들의 비정한 탐욕을 읽어내기엔 잘 가꾸어진 잔디와 꽃밭과 산책로가 지극히 평화롭다. 이렇게도 업보를 갈음하는가 싶다. 물결치듯 이어지는 고분군의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기울어가는 햇살이 미끄럼을 타는 적요한 오후다.

해오라기, 백로, 쇠물닭 등 여름 철새가 날아들어 늪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소리꾼이 있었다, 신명 한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한 대목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항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맸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 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배한봉, ‘우포늪 왁새’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