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 - 다시, 시월 봄날

정원 여행자

강원도 홍천 - 다시, 시월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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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절의 풍미를 온전히 누리지 못하면 다음 계절로의 환승이 못내 껄끄럽다. 복잡한 지하철 환승로에서 갈아타야 할 노선을 더듬거리다 우두망찰하는 격이랄까. 어느 날 문득, 잎도 열매도 다 떨군 빈 가지에 허를 찔리지 않으려거든 울긋불긋 열꽃 피운 가을 숲을 너끈히 걸어볼 일이다.

[정원 여행자] 강원도 홍천 - 다시, 시월 봄날

[정원 여행자] 강원도 홍천 - 다시, 시월 봄날

하복, 동복, 춘추복의 구분처럼 봄과 가을은 종종 한 묶음이 된다. 격하게 춥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이 이들을 묶는 가장 흔한 이유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공통점은 두 계절 모두 참 좋은 시절이라는 것. 카뮈의 말마따나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꽃은 남녘에서 하루에 30km 속도로 북상하고, 단풍은 북녘에서 하루에 20km 속도로 남하한다. 내 집 문 앞까지 번지도록 가만 기다리지 못하고 이미 무르익었다는 발원지로 지레 달려가는 마음은 봄과 다를 바 없다. 꽃놀이처럼 단풍놀이 역시 타이밍이 관건이며, 좋은 시절은 늘 야속하리만치 짧다. 사나운 바람에 가을비라도 내리면 별안간 겨울이 될 터. 10월에 돌아온 두 번째 봄날, 서둘러 가을꽃 마중을 나서야 하는 이유다.

‘붉을 홍(紅)’이 아닌 ‘넓을 홍(洪)’을 쓰건만, 홍천(洪川)의 첫인상은 붉다. 군 전체 면적의 84%가 산지다 보니 눈길 닿는 곳마다 물오른 단풍이 지천이다. 홍천은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의 3배에 달하는 넓이에, 강원도 총 면적 중 10.7%를 차지한다. ‘동서 300리’라 부를 만큼 좌우로 길쭉하게 뻗어 있어 동쪽과 서쪽의 기후가 5℃ 이상 차이 나고, 심지어 말씨가 다를 정도다. 강릉, 양양과 맞닿은 동쪽 지역은 영동 지방 사투리를 쓰고 가평, 양평과 맞닿은 서쪽 지역은 경기도 말씨에 가깝다는 것. 넓은 땅은 강마저 길게 품고 있어 산을 넘고 강을 따라 깊어가는 가을로의 여정을 만끽할 수 있다.

단풍 반, 사람 반으로 북적이는 관광지가 버겁다면 한적한 시골 마을과 홍천강을 끼고 걷는 개야리 에움녹색길을 눈여겨보자. 강물소리길, 갈대숲길, 밤나무길 등으로 이루어진 7.5km 남짓한 트레킹 코스로, 아직 덜 알려진 때문인지 호젓한 산책이 가능하다. ‘에움’은 ‘사방을 빙 두르다’라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 여행자센터로 리모델링한 폐분교와 가을걷이 중인 농촌 풍경이 정겹다. 깨 타작이 한창일 때라 어딜 가나 탁-탁- 도리깨질 소리에 고소한 깨 냄새가 진동한다.

1·2 호젓한 트레킹을 원한다면 개야리 에움녹색길을 걸어보자. 강변을 따라 정겨운 시골 마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다. 3 노란 융단이 깔린 숲길은 포근포근하다. 가을꽃 단풍은 발밑에서 한 번 더 활짝 만개한다.

1·2 호젓한 트레킹을 원한다면 개야리 에움녹색길을 걸어보자. 강변을 따라 정겨운 시골 마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다. 3 노란 융단이 깔린 숲길은 포근포근하다. 가을꽃 단풍은 발밑에서 한 번 더 활짝 만개한다.

공작의 깃털처럼 아찔한 추색
국내 명승지는 대개 오래된 절을 끼고 있게 마련이라, 여행을 다니다 보면 반드시 천년 고찰을 만나게 된다. 홍천의 9경 중 하나인 공작산 수타사도 그러한 경우. 신라 성덕왕 7년(708)에 창건된 고찰로, 오랜 역사에 걸맞게 월인석보(보물 745호)를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두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처럼 산자락을 뻗어 내린 공작산은 이름만큼이나 수려한 산세를 자랑한다. 공작이 알을 품은 듯한 ‘공작포란형(孔雀抱卵形)’ 명당에 자리 잡은 것이 수타사다. 어쩐지 아늑하더라니, 풍수를 몰라도 땅의 기운은 몸이 절로 감지하는 모양이다.

수타사 단풍은 단청보다 화사하다. 이토록 짙고 노골적인 빨강이 절을 에워싸도 되나 의아할 지경이다. 신라의 여승 설요는 스물한 살 봄날, ‘꽃 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 아, 이 젊음을 어찌할 꺼나’라는 시 한 줄을 남기고 환속했다던가. 산에 불을 놓은 듯 아찔한 추색(秋色)이 수행자의 단정한 마음에 도깨비불처럼 번질까 저어되는 가을 산사다.

흔히들 단풍을 표현할 때 “곱게 물들었다”라고 말하지만, 실은 울긋불긋한 색소가 더해져 단풍잎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엽록소가 빠지면서 본래 가지고 있던 붉고 노란 제 색깔이 드러나는 것이라 한다. 뜨거운 광합성의 여름, 초록이 들끓는 생장의 계절을 지나 본래 자아로 돌아온 단풍은 얼마나 위풍당당한가. 일찍이 시인 백석은 저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보고 ‘어데 청춘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둘 두려움이 있느뇨’라고 예찬한 바 있다. 가을볕에 붉게 익은 중년의 얼굴도 청춘의 홍안 못지않다고 우겨볼 따름이다.

수타사를 한 축에 두고 초승달처럼 휘어진 형태의 공작산 생태숲은 자생화원, 수생식물원, 생태관찰로 등 알토란 같은 구색을 갖추고 있다. 미리 숲 해설 프로그램을 신청해 보다 적극적으로 숲과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공작산 생태숲을 통과해 수타사 계곡을 끼고 걷는 산소길은 이름 때문인지 유독 공기가 청량하게 느껴진다. 피톤치드는 활엽수보다 침엽수에서, 또 물이 있는 곳에서 더 많이 생성된다고 하니 계곡을 따라 걷는 산소길이 제 이름값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울울창창 하늘 높이 치솟은 잣나무와 단풍이 가장 아름답게 든다는 마가목, 옅은 바람결에도 파도 소리를 내며 온몸을 떠는 은사시나무 등 가을 숲의 이야기를 귀동냥하며 오솔길을 걷노라면 길동무가 없어도 적적하지 않다. 산소길은 계속해서 계곡 상류로 이어지지만 출렁다리에서 계곡을 건너 다시 수타사로 내려갈 수 있다. 출렁다리 아래로는 ‘귕소’라 불리는 웅덩이가 있다. 이곳 말로 소나 말의 여물통을 ‘귕’이라 하는데, 바위가 움푹 파인 모양이 여물통을 닮아 붙은 이름이다. 수타사에 가까워질 즈음, 박쥐굴을 통해 용이 승천했다는 용담을 볼 수 있다.

제철은 아니지만 수타사 앞의 연지도 아름답다. 가슬가슬 말라비틀어진 연잎으로 가득한 못은 풍성한 빛과 색의 향연 한 축으로 이 계절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소멸의 풍경이다. 가장 눈부신 날은 속절없는 붕괴의 서막. 절정에 이른 단풍을 바라보며 이런 시구절이 떠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닳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김사인, ‘화양연화’ 중에서)


1.2 해마다 가을이면 불꽃처럼 타오르는 공작산의 붉은 단풍이 곱게 늙어가는 천년 고찰 수타사를 에워싼다. 3.4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산소길은 산 좋고 물 맑은 홍천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1.2 해마다 가을이면 불꽃처럼 타오르는 공작산의 붉은 단풍이 곱게 늙어가는 천년 고찰 수타사를 에워싼다. 3.4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산소길은 산 좋고 물 맑은 홍천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노란 비가 내리는 천년의 정원
홍천의 동쪽 끝, 오대산 자락과 인접한 내면 광원리엔 10월 한 달만 개방하는 은행나무 숲이 있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공원도 아닌 사유지로, 2,000여 그루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 때면 그런 장관이 다시 없다.

30여 년 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삼봉약수가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근방으로 이사를 온 부부가 있었다. 만성 소화불량으로 오랫동안 고생해온 아내의 쾌유를 빌며 남편은 은행나무 묘목을 하나둘 심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묘목은 아름드리나무가 됐고, 아내는 건강을 되찾았으며, 가을마다 노란 비가 내리는 숲에 대한 소문은 군을 넘고 도를 넘어 퍼져나갔다. 남편은 부부의 정원을 세상에 공개하기로 결심한다. 축복과도 같은 풍광을 널리 공유하고자 한 것. 은행나무 보시 혹은 회향인 셈이다.

숲의 주인이 왜 하필 은행나무를 심었는지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궁금하지도 않은 것은, 그것이 은행나무이기 때문이다. 암수 딴 그루인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서로 마주 봐야 열매를 맺는다. 20년 전의 판타지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서도 은행나무는 천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랑의 매개체였다. 66세의 괴테는 35세 연하의 젊은 연인에게 은행잎 모양에 자신의 마음을 빗댄 시로 사랑을 고백했다고 한다.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넣어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는 수타사 용담.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넣어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는 수타사 용담.

‘둘로 나누어진 한 생명체인가 / 아니면 서로 어우러진 두 존재를 / 우리가 하나로 알고 있는 것일까 / (중략) / 그대는 내 노래에서 느끼지 못하는가 / 내가 하나이면서 둘임을.’ (괴테, ‘은행나무 잎’ 중에서)

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는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됐던 히로시마에서도 살아남은 나무다.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심는 이유도 그 때문. 이산화황과 미세먼지 등 오염 물질의 흡수력이 뛰어난데다 생장이 빠르고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까닭이다. 인류보다 먼저 지구에 뿌리를 내린 은행나무는 소철, 메타세쿼이아와 함께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은행나뭇과에 하나뿐인 나무로, 지구상에 오로지 1과 1속 1종만이 존재한다. 2억 년 이상을 그렇게 단독자로 살아왔다.

10월 첫 주에 70% 정도 물들고 둘째 주 중·후반이면 절정을 이룬다지만, 은행나무 숲은 잎이 져도 장관이다. 노란 카펫이 깔린 숲길을 사박거리며 걷노라면, 노란 벽돌길을 따라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가는 도로시가 된 기분이다. ‘나무에서 한 번, 땅 위에서 또 한 번 피는’ 꽃이 동백만은 아닌 모양이다. 발밑에서 주워 책갈피에 간직하는 것도 가을꽃, 단풍의 멋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노란 비가 쏟아진다. 팔랑팔랑 수천수만의 노랑나비 떼가 날아든다. 정지 화면처럼 고요한 백발노인의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은행잎을 바라본다. 은행나무의 꽃말은 ‘장수’라고, 다가가 속삭이고 싶었다.

[정원 여행자] 강원도 홍천 - 다시, 시월 봄날

[정원 여행자] 강원도 홍천 - 다시, 시월 봄날

Tip 삼봉약수&삼봉자연휴양림
천연기념물 제530호로 지정된 삼봉약수는 은행나무 숲에서 멀지 않은 삼봉자연휴양림 안에 있다. 철분, 망간, 불소, 탄산 등이 함유돼 위장병, 빈혈, 신경통 등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3대 약수로 손꼽힌다. 삼봉자연휴양림은 침엽수와 활엽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1급수에서만 서식하는 열목어와 도롱뇽, 반딧불이도 볼 수 있을 만큼 청정한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한옥, 캐빈, 야영장 등 다양한 숙박시설을 갖추고 있다.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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