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4대 갈대밭 중 하나인 신성리갈대밭은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인근 주민들이 갈대를 꺾거나 게를 잡으러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을 잃고 헤맸다는 옛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마량포구는 바다 쪽으로 꼬리처럼 튀어나온 땅 끄트머리에 자리 잡았다. 동남쪽으로 치우친 비인만을 안고 있어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르는 완전무결한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해가 남쪽으로 많이 기우는 동짓날을 중심으로 50일 전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가 적기다. 해 지는 서해에서 해 뜨는 풍경을 보려거든 이처럼 끝과 시작이 맞물려 있는 시절이어야 한다.
예부터 민간에선 동지를 설 다음 가는 작은설로 대접해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라고 했다. 중국 주나라에선 광명이 부활하는 날이라 하여 동지를 설로 삼았다.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에 ‘태양의 부활’이란 의미가 부여된 것은, 동지를 정점으로 그다음날부터 낮이 점점 길어지는 까닭이다.
간당간당 두 장 남은 올해의 달력을 만지작거리며 속이 헛헛해올 때면 어둠의 정점을 찍고 부활하는 태양의 힘을, 끝이 곧 시작이 되는 자연의 법칙을 되새겨볼 일이다. 인디언 달력을 빌리자면, 강물이 얼고 기러기 날아가도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 11월 아니던가.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는 땅을 찾는 이유도 그래서다.

마량포구는 동남쪽으로 치우친 비인만을 안고 있어 바다 위로 둥실 떠오르는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일출과 일몰로 유명한 마량포구지만, 포구 뒤편 야트막한 동산 자락을 에워싼 동백나무 숲도 장관이다.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마량리 동백 숲은 서천8경 중 1경으로 손꼽힌다. 오랜 숲답게 당연히 전설도 깃들어 있다. 500년 전 마량의 수군첨사가 꿈꾸길, 바다 위에 떠 있는 꽃무리를 잘 번식시키면 마을이 번영하리란 계시를 받았다는 것. 실제로 바다에 나가 발견한 붉은 꽃을 건져 심었더니 마을엔 내내 풍어의 기쁨이 이어졌다고 한다.
마량리 동백은 4월 중순경에야 절정을 이루는 춘백(春栢)이라 이즈음엔 꽃 볼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반들반들 윤이 나는 진초록 이파리들 속에 드문드문 붉은 꽃이 눈에 띄었다. 철모르고 핀 저간의 사정이야 꽃만이 알 일이지만 맵찬 바람을 버티는 동백이, 앙다문 입술을 부르르 떠는 그 붉은 결기가 반갑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동백 숲을 뒤에 두르고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동백정은 서천의 일몰 명소다. 누각에 오르면 동해처럼 망망한 서해 바다가 펼쳐진다. 너른 바다 위의 한 점 바위섬과 꺼져들기 전 마지막으로 활활 타오르는 낙조가 말을 아낀 선시(禪詩) 같다. 동백이 툭-툭- 지는 소리가 들리는 계절에 이 숲을 다시 찾으리라 다짐했다. 숲에선 해 같은 꽃이 지고 바다 위에선 꽃 같은 해가 질 터인즉.

1 동백 숲을 뒤에 두르고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동백정은 서천의 일몰 명소다. 2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마량리 동백나무 숲. 숲 위에 자리한 동백정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장관이다. 3 서천군의 대표적 특산품인 한산세모시의 맥을 잇고자 건립한 한산모시관. 4 감미로운 술맛에 한 잔 두 잔 하다 보면 취기가 올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일명 ‘앉은뱅이술’.
서천의 특산품으론 한산세모시와 한산소곡주를 빼놓을 수 없다. 희고 맑은 색감에 섬세한 결을 지닌 한산세모시는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으로 명성을 떨쳤다. 잠자리 날개처럼 가벼워 여름철 옷감으로 으뜸이다. 한산소곡주는 백제의 궁중 술로, 백제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빚어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번 맛을 보면 일어나지 못한다 하여 일명 ‘앉은뱅이술’이라고도 불린다. 소곡주는 달고 짙고 끈끈하다. 술이 꿀맛이다. 술잔에 흘러내린 술이 손가락에 끈적하게 들러붙어 술을 마시다 말고 손가락을 쪽쪽 빨았을 정도다. 찹쌀로 빚은 술이라 달기도 하거니와 엿기름가루도 들어간다. 여기에 생강, 국화, 고추가 독특한 향미를 더해 달아도 질리는 맛은 아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자면 이 정도 단맛은 필요했겠구나 싶다. 술맛에 반해 과거를 놓친 선비, 도둑질을 하려다 술에 취해 붙잡힌 일화 등 소곡주에 얽힌 옛날이야기들을 안주 삼아도 즐겁다. 한산모시관과 소곡주 양조장은 한산면에 바로 이웃해 있다.

주꾸미, 전어, 광어 등 1년 내내 해산물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홍원항.
광활하게 펼쳐진 갈대밭은 영화나 드라마가 유독 사랑하는 촬영지다. 멜로든 액션이든 스릴러든, 갈대밭이 소화 못할 장르는 없다. 연인이 걷고 있다면 더없이 애틋하고, 쫓기는 이의 다급한 뒷모습에선 날 선 긴장감을 부추기는 배경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남한군 이수혁 병장(이병헌 분)과 북한군 오경필 중사(송강호 분)가 야간 수색 작전 중 우연히 만나는 장면의 배경도 늦가을의 갈대밭이었다. 충남 서천군 신성리의 금강변 갈대밭이 바로 그곳.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슬픈 연인, 무혁(소지섭 분)과 은채(임수정 분)가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세를 타고부터 가족과 연인, 출사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신성리 갈대밭은 한국의 4대 갈대밭으로 꼽히는 동시에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갈대 7선에 속할 만큼 진경을 자랑한다.
한산면 면소재지에서 강경 쪽으로 300m가량 지나 삼거리에서 금강 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3km쯤 가다 보면, 서천군과 군산시가 만나는 금강하구 변에 펼쳐진 갈대밭을 조망할 수 있다. 탐방객들을 위해 조성한 갈대공원은 전체 갈대밭 면적의 2, 3% 정도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소중한 생태자원으로 보존하고 있다. 어른 키를 웃도는 갈대가 양옆으로 도열한 2km 남짓한 산책길은 갈대소리길, 철새소리길, 갈대문학길, 솟대소망길, 영화테마길 등 다양한 테마로 조성돼 산책의 묘미를 더한다.

1 해마다 희귀종의 겨울 철새와 탐조객들이 모여드는 금강하굿둑. 조류생태전시관에서 금강과 철새의 생태를 학습한 뒤 탐조에 나서는 것이 좋다. 2 주꾸미, 전어, 광어 등 1년 내내 해산물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홍원항. 3 어른 키를 웃도는 갈대가 양옆으로 도열한 2km 남짓한 산책길은 솟대소망길, 철새소리길, 갈대문학길 등 다양한 테마로 조성돼 있다.
갈대밭에 이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앞에 놓고 느꼈던 먹먹함을 경험해본 일이 있다면, 드넓게 펼쳐질수록 감탄을 자아내는 갈대밭의 미학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멀리서 조망하자면 흡사 망망대해처럼 보이는 게 광활한 갈대밭의 멋이다. 면적 10만여 평에 이르는 신성리 갈대밭은 규모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새들의 보금자리는 사람에게도 이롭다. 민물과 바닷물의 적당한 교차로 튼실하게 자란 신성리 갈대는 서천의 특산품인 갈꽃비의 재료가 되는데, 수수비와 달리 갈꽃의 부드러움이 섬세한 먼지까지 쓸어주는 것이 특징이다. 갈대밭에 사는 게라 하여 이름 붙은 ‘갈게’는 껍질이 얇고 무른데다 맛이 좋아 장에 내다 팔면 꽤 쏠쏠한 수익원이 됐다고 한다. 다양한 용도로 마을 주민들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내던 신성리 갈대밭은 외지인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중요한 관광자원으로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에겐 한 자락 소중한 쉼이 되고 추억이 되며, 또 누군가에겐 생계와 생존의 요긴한 수단이 된다. 두루 둥글게 품어내는 이 땅을 생명의 정원이라 이름해도 좋겠다.
해마다 겨울이면 금강하굿둑엔 각양각색의 철새들이 찾아든다. 큰고니, 청둥오리, 검은머리갈매기, 재두루미 등 혹한을 피해 쉬지도 먹지도 못한 채 날아온 손님들이다. 이즈음 금강하굿둑을 서성이는 탐조객들은 기다림의 목적이 같다. 짙은 황혼녘, 일순간 먹구름처럼 하늘을 뒤덮는 가창오리떼의 장엄한 군무가 그것. 해가 다 지도록 가창오리떼는 감감무소식이었지만, 저무는 하늘에 선명한 흰 금을 그은 비행운과 쇠기러기떼의 V자 편대비행이 교차하는 순간을 만났다. 사람의 비행이 남긴 궤적 위로 새떼의 비행이 겹쳐진다. 공존은 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임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정원 여행자] 충남 서천 -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고](http://img.khan.co.kr/lady/201511/20151106155939_6_151106_jeong_06.jpg)
[정원 여행자] 충남 서천 - 해가 지고, 다시 해가 뜨고
2013년 금강하구 인근에 오픈한 국립생태원은 축구장 90여 개 규모에 4,500여 종의 살아 있는 동식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 국내 생태 전시·연구의 요람이다. 국립생태원의 랜드마크인 에코리움에선 한반도 생태계를 포함해 열대, 사막, 지중해, 온대, 극지 등 세계 5대 기후와 그곳에서 서식하는 동식물들을 한눈에 관찰, 체험할 수 있다. 이 밖에 야외에도 습지생태원, 고산생태원, 사슴생태원 등을 갖추고 있다.
문의 041-950-5300, www.nie.re.kr
■글 / 고우정(여행작가) ■사진 / 현일수(리빙룸스튜디오)